펜실베니어 출신 조지 그레이 버나드(George Grey Bernard)는 유명한 조각가.
배움을 따질 건 없지만 유명한 두 개의 학교를 나오고, <석공石工 1902>, <사랑과 출산 1910>, <(아기) 탄생 1913>을 조각한 후에 링컨 모델을 마치 '양아치 오라비같이 조각한 8피트 청동상 (像. 1925)'이 신시내티 라이틀(Lytle*) 파크에 세워지자 비난을 받음.
'마른 체격, 약간 위를 쳐다보는 듯한 길게 뺀 목, 갈라진 한 배 새끼에 천부의 쓸쓸한 표정, 구부정한 다리, 아버지가 입다 넘겨준 듯한 헐렁한 옷에 낡은 구두. 몰라볼 링컨의 청동 입상(立像)'.
쉬카고 예술학원 졸업 후에 그의 학구적이고 근면한 장인정신.
그가 프랑스에서 학교다니는 4년(1883-'87) 동안 그는 착실히 도제(徒弟) 생활.
국립예술학교; 에콜 나쇼날레 시페례욀 데 복스-아즈(E'cole Nationale Supe'reure des Beaux- Arts), 캐주얼(casual) 아뜰리에 '피야르-줄 카발레(Pierre-Jules Cavalier)' 도제로 수련.
그의 작품은 세속에 영합하는 다른 조각가들에 의해 이미 나온 것과 확연히 다름.
더블린 출신으로 이민 온 상트고든즈(Saint-Gaudens)는 쉬카고 링컨 공원에 링컨이 좋은 의자 앞에 뒷 손 쥐고 서있는 자비롭고 생각에 잠긴 품위를 8피트 청동상으로 표현(1900)해 주었고,
아이다호 출신 볼그룸(Borglum)은 링컨이 사람들이 오가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한 손을 벤치 위에 올려 놓고, 오가는 아이들을 무릎 위에 앉혀줄 자세, 5피트 청동상(1919).
이 조각가가 사우스 다코다 러시모어 산정의 큰 바위 대통령상을 설계하고 조각.
뉴햄프셔 출신 프렌치(French)는 링컨 기념관 안 옥좌에 앉은 20피트 대리석상(1918-'20).
마치 피디아스(Phidias)가 팔테논 신전 정중앙 지붕 밑, 맛배지붕(牔栱) 마룻대 밑의 옥좌에 앉힌 제우스상(像)처럼, 신고전주의 사원 구조물.
하지만, 위대함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위대해질 때까지의 고뇌의 길을 표현하는 게 아닐까요?
링컨의 지혜를 장식하거나 건축조각으로 하기에는 그가 너무나 외로웠다고 봅니다.
버나드의 그 양아치같은 조각은 인류에게 불을 가르쳐준 고뇌의 프로메테우스.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미움을 받아 독수리에게 간을 뜯겨 먹히는 벌을 받음.
링컨 역시 자신이 죽임받을 줄 이미 알고 있섰고, 자신의 관(棺)이 옮겨져 가는 꿈을 꿨음.
1862년(링컨 1809-재임 1861-'65) 그가 특별자문위원회의를 소집시킨 날, 그는 유머 작가 알테무스 워드(Artemus Ward. 본명 Charles Farrar Browne 1834-'67)의 <고자세 유티카 사람의 모욕 A High-Handed Outrage of Utica>을 정독할 때 회의실로 들어오는 참석자에게 눈을 주지 못했음.
그러더니 갑자기 포복절도하면서 "왜들 안 웃느냐? 밤낮으로 엄습하는 공포에 젖은 긴장, 만약에 내가 웃지 않으면 죽어, 당신들도 이런 약이 필요해'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그의 돌연 천박한 웃음은 가을 바람이 귓 가를 스처가는 격.- 추풍과이秋風過耳
그가 본론으로 돌아와, 노예해방령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초안 잡은 쪽지를 내보입니다.
"이 작은 쪽지가 매우 의미가 깊소!"
큰 것을 잡기 위해서 작은 것을 놓아주는 전략.
그 것은 적대국인 남군 영토 안의 흑인노예를 넉살좋게 해방시키겠다는 선언문.
이 링컨이 저격사당한 후 스물 두살 아들 토드(Todd)에 의해 아버지 주머니에서 나온 건 신문기사 9쪼가리와 남부 지폐 5달러 짜리 한 장.
제 생각에는 미운 오리새끼로 보이는, 그 양아치 오라비 링컨상(像)이 에이브라함 링컨의 품성과 신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모델이라고 여깁니다.
링컨이 몽매(夢寐)에도 잊지 못하는 롤 모델 주님을 생각하며.
* 라이틀(Lytle); 아이리쉬계 성(姓).
William Haines Lytle. 오하이오 신시내티 출생(1826). 변호사. 라이틀 시집 출간(1894 사후출판).
링컨 북군 준장(Union brigadier-general). 테네시 주 치카뭐가(Chickamauga)에서 교전 중 전사(1863).
1863년 9월 19일, 치카뭐가 전투에 남군(Conferaracy) 승리, 하지만 동년 11월 25일, 차타누가(Chattanooga) 전투에 북군(Union) 승리로 사기를 만회함.
.................................................................................................. 감사합니다. dkp 올림. 8-2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