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털 끝만큼 틀려도 천리가 차이가 난다.-실지호리(失之毫釐), 차이천리(差以千里), 기점구의(其漸久矣)
옥타비아누스:
대의(大義)를 모르면 그 죄의 명분으로 죽임을 당한다.- 위지부지기의(爲指不知其義), 사죄지명(死罪之名)
데모스테네스(385?-322 B.C.):항상 신중하고 정치, 사법에 조크 없이 심각한 미학적 수사학(修辭學)적, 찬사의 연설.
돈을 좋아함.
다리우스 3세로부터 뇌물을 받고(330 B.C.), 해상무역업자에게 고리채 돈놀이를 함.
이 전부터 그는 필립픽 연설(Philippics)로 마케도니아의 침략을 맹렬히 비난(352 B.C.).
그는 마케도니아 아테네 대사 안티파텔(Antipater) 장군을 맹렬히 비난하여 쫓아버려짐.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보물책임자 하팔루스(Harpalus)가 보물을 챙겨 도망오자 뇌물을 받음.
그 다리우스 왕은 페르샤 태수 벳수스(Bessus., Satyrap)에게 살해(330 B.C.)되고, 하팔루스는 크레테(Crete)로 도주하다 암살됨(324 B.C.).
그 안티파텔, 크라테루스(Craterus)가 아테네를 다시 점령하자 도주(322) 후에 자살함.
시세로('키케로', 106-43 B.C.);
정석으로 공부. 스토아 철학풍(風).
친구보다도 자기에게 청탁한 사람 편에 들어 우수꽝스런 익살을 섞어가며 무조건 편들음.
그는 정부 조직에 집정관(consul) 직분을 창안한 사람.
그 즈음에 카토(Cato, M)는 카틸린(Catiline)보다 자기를 밀어주고, 시저보다 폼페이를 지지.
그러나 집정관을 뽑는데 뇌물수수한 무레나(Murena, L) 편을 들며 불합리한 논리를 펴더라도 쾌감을 느끼는 시세로(62 B.C.).
아프리카 총독 그 카틸린(67-66 B.C.)이 로마로 침입, 일을 벌려 집정관 살해음모한 죄를 진압한 후 살해되자 시민이 카토를 호민관(Tribune)으로 뽑아줌(62 B.C.).
시저가 죽임을 당하다(3-15-44 B.C.).
시저는 옥타비아누스의 외삼촌.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Atia)의 오빠.
시저를 죽인 브루투스 편에 선 시세로는 시저가 살해되자 누구보다도 기뻐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시세로의 정의(正義)를 필요로 하기에 복수의 기회를 벼르고, 다른 이의 분노의 칼을 기다림.
시세로를 남의 칼로 베어내는 차도살인(借刀殺人),
안토니가 지쳤을 때 제거하는 이일대로(以逸待勞).
말하자면 손자병법의 승부수 제 3계, 제 4계인 셈.
그 시세로가 12월 20일(B.C. 44)에 행한 3, 4 그리고 14번째 <안토니에 대한 웅변(M. Antonium Oratio Quarta Decima)>에서 '안토니에 대한 승리(litteris)'를 선언하며 안토니를 로마의 적으로 판정하자고 사납게 힐난(4-21, 9-2-43 B.C.).
안토니는 시세로가 자기를 찌르는 야유(刺譏자기 stinging sargasm)에 복수를 다짐.
시세로는 성(性)을 파는 포주(pimp), 정치로비스트는 그게 그 것(proxenetas), 비슷하다고 비난.
이 14번 째 필립픽 연설에서 그는
1. 여지껏 전투병이 평상복 토가(toga)를 입는데 군복을 입히자.- ad saga
2. 작은 승리를 오반템(ovantem),
3. 승전을 보장할만한 장군을 사령관(imperator),
4. 혁혁한 수훈을 세운 사령관을 밀리툼(militum)이라고 호칭할 것.
5. 한꺼번에 여러 메달을 주지 말되 전사자에게는 허용하자(civibus omnibus).
원로원이 사람을 보내어 안토니는 갈리아, 무티나(Mutina)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불복.
이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에게 시저의 유산을 로마 시민으로 돌리자고 말하자 다 썼기에 남은 돈이 없다고.
까닭은 시저가 죽기 전에 갈리아(Gallia Cisalpina) 총독으로 브루투스(Brutus, Decimus)를 임명했지만 안토니가 44 B.C. 12월부터 이듬해(43 B.C.) 4월까지 자리를 내어 놓지 않았기 때문.
시세로는 청렴함.
그가 시실리의 형사재판관(questor)으로 재직시에 카파토키아(Cappadocia) 왕 아리오발잔네스(Ariobarzanes) 3세가 지방총독이었을 때에 주는 하사금을 거절함(75 B.C.).
그는 고리대금(usury)을 계급정치(hierarch)를 조성하는 실습이라고 비난.
그는 베레스(Verres) 총독의 부패를 탄핵하는 웅변을 토함(70 B.C.).
시저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연설을 할 것 같아 옥타비아누스와 랠리우스(Laelius)가 문득 시세로에게 자리를 피해달라자 못 들은 척했음.
그는 시저 이전의 정부 구조로 복구하기를 원함.
결국 베레스는 안토니에 의하여 죽임을 당함(B.C. 43).
제 2삼두정치(triumvirate).
안토니, 옥타비아누스 및 레피두스(Lepidus, Marcus Aemilius).
이들이 처벌자 명단(proscription list) 작성.
이에 63세 시세로 역시 불쌍하게 죽임을 받음(1. 3. 106-12. 7. 43 B.C.)
그리고 며칠 후에 그의 동생 퀸투스(Quintus, 102-43 B.C.) 역시 살해당함.
그는 캘트족의 갈리아(gaul) 지역에 파견나간 우수한 장군.
시세로에게 백부장 헤렌니우스(Herennius., centurion), 군단사령관 포필리우스(Popillius., tribune)가 찾아오자 시세로의 하인 필로구스(Philogus)가 그가 있는 곳을 고자질하여 안토니의 명령으로 헤렌니우스가 시세로에게 두건을 씌우고 목을 베고 가져가자 안토니가 평소에 시세로가 웅변했던 공회당 연단 위에 걸어 놓아 로마 시민으로 하여금 보는 이마다 몸서리 치게 함.
어느 날 옥타비아누스는 누이 옥타비아(42?-62) 집을 방문.
그 곳에서 조카가 책을 읽다 옷 속으로 감추는 걸 보고 빼앗아 읽었을 때에 그 것이 시세로의 명연설문.
이에 그가 "아이야, 이 사람은 학자야. 그리고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지"라고.
그리고 돌아온 즉시 안토니를 몰아내고, 시세로의 아들 말쿠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39 B.C.), 민심의 동요를 감안한 옥타비아누스 추천으로 집정관(consul)(30 B.C.) 보직.
그리고 얼마 후 아시아/시리아 총독(proconsul)으로 좌천.
참고:
사마천(史馬遷) 사기(史記) 券五 14.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Bennett A. Cerf et al:<Plutarch The Lives of the Noble Grecians and Romans>. trans. by John Dryden. p. 1041- 1071 Modern Library 1864
William R. Harper et al:<Ten Orations of Cicero>. p. 217-232, 378-405 American Book Company 1898
.................................................................................................. 5-23-16 ^-^ dk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