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렘브란트: 렘브란트 하멘스-준 반 린(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부인 사스키아: 사스키아 반 오이렘버크(Saskia Van Uijlenburgh)
하녀 헨드리켸; 핸드리켸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
네델란드의 명장 렘브란트(1606-'69. 63세)는 28세 되던 해(1634년)에 부요한 사스키아와 결혼하여 아들 티투스(Titus 1641-'68)를 낳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 <돌아온 탕자(루가 22:54-57)> 등 렘브란트 화풍을 낳음.
그런데 1654년에 처녀 헨드리켸가 임신하여 남편이 정해지지 않고 배만 불러가기에 암스텔담 개혁교회 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녀는 "화가 렘브란트와 간음을 했읍니다"라고 고백.
그리하여 결혼을 빙자하지도 않고 하녀가 주인 렘브란트에게 매춘행위를 한 혐의로 위원회는 그녀에게 회개와 보속, 평생 주일예배에서 영성체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를 금지당합니다.
그리고 쌍벌죄 렘브란트에게는 "이브가 사과 따는 행위"에 당한 것으로 배심원들이 정상을 참작하여 무죄.
어둠에서 빛을 찾는 명암대조법(chiaroscuro)의 명장인 그가 48세되던 해.
그러나 이로 인한 소문으로 그의 작품 가격이 폭락하여 드디어 파산선고.
그의 사정이 팔자가 펴나보다 했더니 어둠으로 되돌아가 집도 잃고, 생활비에 쪼들려 그림도 헐값으로 다 팔렸고, 아들과 헨드리켸와 살다가 27세된 아들마저 죽고 다음 해에 그가 죽어 월세 묘지에 묻힘.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에서 8년간 제 3대 대통령직(1801-'09)을 수행한 토마스 제퍼슨의 경우는 정반대로, 다릅니다.
제퍼슨이 말타(Martha)와 결혼하고 1년 후에 장인 존 웨일즈(John Wayles) 농장?의 노예의 딸 샐리 헤밍즈(Sally Hemings)가 태어남(1773).
제퍼슨이 이 샐리와 1789년에 제임스를 임신하고, 1798년에 차남 Beverly를 낳고, 대통령 취임하던 1801년에 장녀 Harriet을 낳고, 다음 해에 이 사실을 저널리스트 제임스 칼렌더(Callender)가 리취몬드 Recorder에 제퍼슨이 노예를 첩으로 삼고 있다고 보도했을 때 그 제퍼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1805년에 3남 Madison을 낳고, Eston을 1808년에 낳았읍니다.
샐리는 53세 되던 1826년에, 83세 제퍼슨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
제퍼슨은 다음 제 4대 대통령 Madison(1809-'17)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
그가 죽기 전에 샐리와 다섯 아이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다.
그리고 샐리는 62세로 죽다.
제퍼슨은 언제나 백인과 흑인의 피가 섞여지는 것을 "크게 혐오(great aversion)"한다며, "도덕적으로 비위에 거슬려(morally repugnant)" 5남매에게 자신의 제퍼슨 성(姓)을 거부했기에 아희들 라스트 네임이 모계의 성(姓), 샐리의 부친 성(姓)인 헤밍스(Hemings).
그는 "흑인은 백인에 비하여 천부의 재질인 심신이 떨어진다"고 말해왔음.-
The blacks are inferior to the whites in the endowments both of the body and the mind.
그런데 샐리는 왜?
'성노예', "샐리가 섹스는 잘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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