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북부 바스크(Basque) 소도시 게르니카-루노(Gernika-Luno, Guernica),
스페인 내란(1936-'39) 중의 어느 봄날, 1937년 4월 27일. 화요일 장날.
이 곳에 파시스트 프랑코-바아몬다[프랑코] 장군이 정부군을 무찌르기 위해 히틀러에게 원군을 요청한 폭격기가 3시간 동안에, (폭발하면 불을 뿜는) 소이탄 5만발, 32톤을 쏟아부어 초토화되면서 인명이 1600명 사상.
이는 히틀러 앞으로의 유럽 침략계획을 연습한 폭격.
파리의 스튜디오에 있던 피카소가 조간신문의 이 뉴스를 읽고 죄 없는 사람에게 미치는 불행에 기가 막혀 추측되는 대로 15, 45일만에 그린 입체파 그림 <라 게르니카(La Guernica. 1937. 6월)>.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 총독(1936)으로 있을 적에 본국에서 민간이 정부를 상대로 시위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혁명을 일으켜 피의 목욕을 시키려고 거사.
그 파시스트 국가주의 프랑코 최고사령관은 게르니카 폭격은 아스투리아(Asturian) 폭파가(家), 공산당원의 사주를 받은 그 곳 바스크 방화범의 소행이라고 발표.
2년 후에 마드리드에 스페인 주둔 나치 사령관 볼프람 폰 리크토펜(Wolfram von Richthofen)과 프랑코 총통이 승전축 열병식에 나타남.
이로서 피카소의 이름이 더욱 알려져 넬슨 라커펠러가 구입하려 했으나 피카소가 거절하고 카피를 넘겨줌.
사람과 말(馬)이 울부짓는 내용의 원본은 흑백회갈 색, 카피는 단색.
라커펠러를 경유하여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전쟁의 폐해의 상징으로 넘겨줌.
그 후 군인정치가, 미국무장관 콜린 파월이 부시가 (조작한 명분으로 알루미늄 캔이 증거라면서) 미국의 이락공격을 설득시키려 할 때에 이 그림이 부적절하다고 유엔 부대변인 Marie Okabe가 치우라고 지시.
그리하여 이락에서 생사람 잡는 선전포고에 적절하지 않은 배경막화(幕畵, backdrop)로서의 피카소의 폭 7.76m, 높이 3.49m의 이 그림 위에 푸른 천으로 가리게 되었고, 그 후 돌고 돌아 유엔에 다시 오지만 미국의 눈 가리고 아옹.
파월이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기 위해 John Negroponk와 총회장에 입장했을 때의 유엔사무총장(제 7대)은 아프리카 가나 출신의 코피 아난.
코피 아난은 이락의 살상무기의 존재에 의문을 품지만 유엔의 기능은 미국의 것.
전례로 이집트 출신인 전임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Boutros Boutros-Ghali) 사무총장은 연임할 수 있는 그 당시에 미국 유대인 출신의 반대로 중임을 못함(1997-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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