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모태교육으로 시작하여 열세살에 진사에 합격하고 스물 세살되던 해에, 아주 도통한 사람이나 알아 듣는 삼라만상 섭리, 천도책(天道策)을 써내어 장원으로 합격한 이율곡. 그는 동인, 서인 누가 문제를 내던 아홉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워진다. 진사 때부터 강릉 오죽헌에 사설학원,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고시 학원을 차리자 전국에서 제자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는데 그 중 후일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이 그의 문하로 들어온 첫날 스승과의 대화: "소생 이항복이라 하옵니다." "이항복이라 했는가?" "예-." "자네 이름은 익히 알고 있네." 이항복은 기방출입 난봉꾼으로 널리 알려진 잡놈이었으나 어머님 최씨의 꾸짖음으로 신사임당 아들 이율곡 닮으라고 이 학원에 꾸겨 넣었던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난 나이가 많을 뿐 아는 것도 많지 않네. 허나 물어 보면 성의껏 말해줄 테니 친숙하게 대하게나"라자 이항복은 난봉꾼인 자기를 받아준데 대해 의아해하는 주변학생들의 눈치를 보면서 "하오면 무례하오겠지만 소생이 여짓껏 궁금한 것이 있사온데 여쭤 보렵니다." "말해보게." "조그만 머슴아이의 생식기를 자지라 부르고 계집애것을 x지라 부르다, 크면 남자것을 'ㅈ', 여인것이 'ㅆ'으로 변하는 사연은 무엇이온지요"라자 "흐허 ㅎㅎ 아니 자네는 그것도 모르면서 기방 문지방 달아지게 다녔단 말인가. 우선 여자애의 'X지'는 '걸어다녀야 감춰진다'는 뜻의 보장지(步藏之)를 줄여 말하는 것이고, 머슴아이의 자지는 '앉아야 감춰진다'는 좌장지(坐藏之)의 잘못된 발음이고, 'ㅈ'은 그 별것 아니고 만져 보면 '마를 조'(燥), 'ㅆ'은 만져보면 '젖을 습'(濕)을 뜻하는 걸세. 어린애의 그것을 자지라 하는 것은 자식을 낳아 후손의 가지를 치는 막대기란 '자지'(子枝), 계집애의 것은 자식을 담아 기를 '보배스런 연못'(寶池)이란 뜻이다" 라고 미리 준비한 듯 시원시원하게 나름대로 답해 주었다. 개과천선한 이항복은 때가 되어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아홉가지 자격증을 딴 이율곡은 출사(出仕)를 포기한다. 아니면 입을 봉하고 조용했다. 정정이 불안한 명종 재위때부터 문정(文定)대비가 죽을 때까지 20년간, 선조때에도 사화의 기미가 보이면 나서지 않고 피하여 목숨을 보지(保持)했지만, 상대편과 극한 대립을 하지 않는 천도(天道)를 배우지 않은 이항복은 목숨을 보중하지 못했다. 이유는 의롭다고 생각하면 그는 일수불퇴, 장기바둑에서 물려주는 법이 없이 대마불사. 스승이신 율곡은 '변동하고 멈추는 일상 삶에서 일에 따라 각기 그 마땅한 것을 쫒아 얻으라'(皆於日用動靜之間, 隨事各得其當而已)고 가르쳤건만 이항복은 광해군 때 임금의 형 임해군을 변호하다 탄핵을 받고, 14살된 영창대군을 구원하려고 힘썼으며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미움을 받아 삭탈관직에 북청으로 귀양간다. 귀양가며 "철령 높은 곳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띠우다가 임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 본들 어떠리"라고 읊는다. 시의가 불리해도 이항복은 관직을 꼭 붙잡고 있서 출세했으나 시기질투 속의 궁중생활에서 이율곡은 낙향한다. 이율곡은 학문에 전념하고 서경덕의 성리학개론을 비평하고, 시의에 따라 묵은 법을 폐기하고 새법을 만들어야 함을 주장하며 학문의 공리적인 가치 '실효'(實效)를 재고해야 한다는 학파를 만든다. 그의 업적은 이기이원론, 일원론, 모에론 전반을 묶는 성리학의 통일이론 정립이었으며 사십 구세에 영면하여 어머님 사임당이 묻힌 파주 자운산 선영에 묻힌다. 반면에 이항복은 북청으로 귀양간 후 강윤복 집에 신세지고 있섰는데 강윤복은 재물을 잘 간수하며 걱정없이 잘 살고 있는 걸 보고 그제서야 관직에 매달려 다투며 살아오다 결국은 관직 사십년만에 초췌해진 자신의 벼슬이 화무십일홍임을 알아차리고 "시절도 저러하니 인사(人事)도 이러하다. 이러하거니 어이저리 아닐소냐. 이런다 저런다하니 한숨겨워 하노라"라며 다섯달 남짓 더 살았다. 그가 당쟁에 휩쓸려 대역죄로 한음 이덕형과 함께 죽음에 이르렀을 때 목숨을 건져준 이원익정승의 신세도 갚지 못한채 그의 나이 예순 셋에 눈을 감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