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망있는 분은 많이 계셔도 도대체 이 세상에 덕을 쌓은 분이 손 꼽을 정도일께다. 지도자들이 덕을 쌓았다면 싸움이 없을테고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법조계에 종사하는 직종이 사라질 것이다. 하~그 얼마나 이상적이고 천국, 파라다이스, 극락의 경지에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유대사상의 목표는 완전한 덕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했겄다! 이 말을 번지르게 한 탈무드의 초석을 세운 힐렐(Hillel) 또한 남의 신세로 출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겨우 말한 것은 "눈에는 눈, 이(齒)에는 이"(출애급 21)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율법의 근본에는 자비의 필요, 즉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그 힐렐은 말했다;"네게 해로운 것을 너의 이웃에게 행하지 마라. 이게 덕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해석이다. 자~ 어서 가서 공부하거라."
주님보다 대충 100년 전에 그와같이 사랑을 푯대로 삼는 구약의 의미를 뽑아냈다고 보는데 이러한 개념은 불경, 유교 경전에서 뿐만아니라 세속의 어느 누구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윤리관일게다.
각설하고, ...제가 오늘 내일 양일간에 지울 글이옵니다만, (허~그래 지울 걸 왜 써. 하여간 dkp는 열린마당의 요물단지가 아니라 애물단지야. 그래 헐 말 간단명료해야 돼!)
BO S KIM님은 완덕으로 나아가는 열린마당의 길에 일반론으로 선열반님께 덕을 쌓으시라고 충고하시고 선열반님은 똑같은 소리에 어처구니 없게 꾸중을 들으시는 거로 여겨집니다. 저로서는 두분을 존경하는 죄밖에 없으며, 존경하는 태도가 분명함을 바라는 바이온데, 많이 계실 수록 좋다는 생각이기에 Boss 김님은 던지시고 선열반님은 수비하시고 있는 듯한 착각에 어리둥절합니다.
그 던져 올리시는 것이 충곤지 너그러우심의 그물을 던지시는 건지 아리달송하여 댓글로는 제 주변이 짧아 이렇게 아지트를 만든 것에 우선 사과드립니다.
저는 생활속에서 사람이 의지와 기회를 만나도 할 수 없는, 바꿀 수 없는 그 넘어 동내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character personality가 개똥철학이 담뿍 차서 그렇거나 말거나 이 걸 충고하는 것은 무척 어려워 여간 도통, 완덕에 이룬 분일지라도 어렵고 또한 돌아서면 잊혀져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거라 여기고 있습니다. 까닭은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철벽에 둘려 쌓인 그 분깃은 우리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덕망있는 군주로 꼽히던 명치천황이 하면 된다. 되지 아니한 것은 하지 않아서이고 해도 않되는 것은 인간의 수치라고 말했습니다.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란 인간의지에 대한 시조를 제국건설의 야욕으로 병졸들에게 공격명령 내릴 때 써먹은 못또. 그런데 뭐?)
그러나 그 이루지 못한 몫이 '인간의 수치'란 말은 보이지 않는 그 뭐 위대한 신, 흠숭하는 깨달은 지존의 자비한 손 아니면 하느님이시어야 하는 데, 즉 잘못된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각자가 이룩해온 품덕을 이래라 저래랄 수 없고, 비록 어느 누가, 다수의 의견일지라도 당사자의 주의주장, 신념과 소망을 고취시켜 주는 쪽의 충고라야만 비옥한 땅에 심기워지리라고 보는 바입니다. 그 밭에 먼저 거름을 주어 소출을 바라는 농군의 심정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밭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눈과 귀를 열게하는 소출을 걷울 것이고 그리하여 자신이 기대한 충고가 그에게 맞아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상대의 그릇이 적다고 보는 관점이 아닐 겁니다.
그냥 헤집는 거라 여길 뿐 덕이 뭔지 모를께다. 다른 사람에게 바라기 전에 내 자신이 먼저 행하라는 자신을 먼저 살펴보라는 말씀이나, 나의 충고를 받아드려 달라는 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 좀 보고 행하라는 통계적인 말이나 덕을 쌓으라는 말이거나간에, 그 덕, 완덕은 우리가 지향하는 윤리적인 푯대일 뿐 생김새도 없고 이룬 성인은 겨우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극소수되시되 사실은 충고할만한 모범이 되는 그 덕스러움이 무언지 아무도 모르고 본 자가 없기 때문일꺼다.
비록 가칠덕, 무칠덕, 푸라톤의 기본 7덕, 이를 고린도 전서 13장에 '그 중에 사랑이 으뜸'이라거나, 엎어치고 메쳐 신학 7죄 등 윤리학적 기본가치의 별스런 4항목을 만들었다손 쳐도 그건 그 제창자의 관점이지 아무도 그 덕 자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제고된 바에 불도 삼종보시, 사섭법, 무재칠시 및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한 가치를 신학적으로 승화시킨 까닭에 '덕망'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자태이라야만 할 것이라 여겨진다. 삼라만상의 이 '덕의 도리'(도덕)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기에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불가가 영탄한 말이 천상천하'무여불(유아독존). 어울려 살긴 살아도 생각해 보면 외롭지만 나 홀로 그 길을 찾아 따라나간다는 뜻일께다. 그러나 서로 신세지며 살지 않을 수 없기에 덕망은 이웃과 비집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음이란 필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할 것이다.
그러므로, 항차 충고가 어찌 만만할손가? 세상의 법을 지켜야 하나, 세상은 이공계 법칙대로 돌지 않고, 그 알 수 없는 불확실성 속의 도(道)에서 살고 있는 바, 마치 내가 무슨 이유로 공부하는지 모르고 공부해온 것 처럼 무슨 이윤지 모르지만 그냥 어구랑 너구랑 어울려 사는 것이 안개 낀 덕망 속을 헤집고 사는 길이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