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짓껏 살면서 겨우 조금 터득한거라고는; 종교는 수많은 분의 인간고뇌. 종교는 사랑스런 추구였습니다. 종교를 가늠하는 신의 존재와 속성. 신의 존재를 논의하는 건 불가지론이라 소크라테스, 파스칼이 말합니다. 신은 완덕의 표상이요 삶은 완덕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힐렐(Hillel)은 말합니다. 그는 탈무드의 초석을 세운 성서를 해석하고 랍비[선생]를 양성하는 율법학교 산헤드린의 학장. 사랑에 대해 예수님보다 100년 전에 개념을 파악해 알려준 분이었습니다.
완덕(完德)은 일곱가지를 말하는 거라며 프라톤이 기본7덕목으로 정리했습니다. 정(正), 지(智), 극(克), 용(勇), 신(信), 망(望) 그리고 애(愛). 이 중에 '신, 망, 애'를 골라낸 분이 사도 바울. 그러나 믿음은 천국을 소망하는 기대감이 있기에 조건없는 덕은 사랑이기에 바울이 사랑을 종교의 첫째 덕목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신(神)은 완덕중의 최고 경지인 사랑의 표상일 겁니다. 그러했기에 사랑을 바울이 신학적으로 승화시켰다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대속하시며 십자가에 매달려 남기신 마지막 일곱 말씀은 사(赦), 낙(樂), 자(子), 사(捨) 갈(渴), 취(就), 탁(託). 이 중에 '용서'는 사랑, '자'는 인간관계, '취'는 사랑의 전파 그리고 '탁'은 사랑이 무엇인지 다 아르쳐 주지 못하고 미진하게 끝낸 세상을 하느님께 부탁합니다란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신을 아는 역사의 연대에 무관하게 두서없이 말하는 걸 허용하신다면 불가의 보시의 조건없는 사랑, 그러나 이 사랑의 허(虛)에 초연한 공무(空無)가 궁극의 경지인가 봅니다. 부처계와 보살계에 잠입하는 스님[선생]들의 자기 구현의 약속 그 서원(誓願)은 모두 인류사랑에 대한 밀집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가까운 자기 본래의 천성에서 찾으라고 불교에서 가르치나 봅니다. 저를 건방지다 나무라지만 마시고, 맹자께서 '구하면 얻고 놓으면 잃어 버린다. 수양은 본래 인간형상에로의 복귀라며 마음을 다하라'는 진심장(盡心章 句上 3)에서, 자신의 본마음이 사랑의 '고향'이라며 성악설을 주장한 고자(告子)를 나무라는 고자(告子 章句上 1~2, 8)에 대한 말씀 또한 우리 모두가 기억합니다.
따라서 '종교'는 곧 '믿음의 마루', '믿음'은 '사랑의 마루', 신은 '사랑의 지혜' 자체인 줄로 느껴짐을 어이할솜입니까. 저는 수많은 역대 다라이 라마 중에 제프리 모세스 '종교의 통일성(ONENESS)'을 설법한 다라이 라마 생각의 일부를 지지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랑을 같이 강조하고 영적훈련을 통하여 자선을 베푸는 인간애의 목표와 신자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이끌어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설법 내용을 단어마다 절절히 옹호하지 않기 때문에 부분만 옹호하는데 내 어찌 무슨 변고입니까? 어떤 일입니까? 그 이유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사랑에 대해 다투고 싶은 마음 자체도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까닭은 제가 종교인의 사랑하는 마음이 진정 무엇인지 나무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기에, 사랑을 영적으로 승화시키신 고오타마 부다의 마지막 경전 마지막 말씀 법귀경(法句經 423章)과 예수님의 마태복음 15장 18절~20절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종교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제가 귀를 기우리고 살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기에 그들이 행복할거라고. 자신이 불자라고 말하는 분은 외롭지 않습니다. 자신이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는 분은 행복합니다. 자신이 무슬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용감합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무지의 행복이 있기에. 자신에게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태평합니다., 신을 모시는 교리에 얽매어 있지 않기에 물에 빠져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 현실일 겁니다. 벼랑에 매달려 있는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그의 신앙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암벽의 상처에 손가락으로 몸을 지탱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은 현실밖에 없을 겁니다., 사람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 이외는. 극단의 경우에 부닥쳐 봐야 그의 신앙심을 알 수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신의 신앙을 뽑낼 수 없나 봅니다. ved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