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는 상대편이 재치가 없는 데서 효과가 발휘됩니다. 따라서 상대편이 마음의 여유가 없을지 모르니까 두 마디를 준비하고 덤벼들어야 하나 봅니다. '살짝 만남(touch)', 그리고 변명(apology)할 말. 찰나적 조우(遭遇)의 의미를 거부하는 상대편의 처지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에 초면의 여인에게 말을 잘못 붙였다가는 구속(枸束)시키려고 주적거린다는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박한 사람의 촐삭거림(levity)이나 농이 아니었고 '정숙한 창녀'(chaste whore)로 생각하는 의미가 아니었다는 두 번째의 인사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여겨집니다. 이유는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지 못했음'(易地思地)에 결례했다고 변명할 줄 아는 언어감각이 있서야 되는 까닭은, 오해할만한 처지, 예를 들어 뇌졸증으로 쓸어지신 친정엄마를 찾아갈 때에 다른 사람과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테고 그녀의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란 인사후에 눈치 보아 같은 공간의 정적을 깨는 안부, 농담, 유머를 쓰면 언제나 별탈이 없을 꺼라고 여깁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유머감각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일단 유사시, 극단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변화구사력(morphing)으로 한 마디 더해야 곤혹스런 부담이 없는가 봅니다. 사실은 말 붙이기가 어려운 우리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말붙이기가 무슨 벼슬날 일인지 도대체 기고 나는 소문이 없는 한 말재주가 무재주인 것 같습니다. 저는 먼저 말을 걸지 않습니다만 인사(人事), 농담, 해학이 오고가는 이 열린마당을 제가 상대편의 표정을 살펴야할 부담이 없기에 좋아합니다. 이 것이 장점이요 단점이라 느끼는데 그 관상에 탄력하는 57개의 표정근(筋)의 신축(伸縮)을 않보아도 말을 걸 수 있는 장점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글자로 보는 라디오, 눈으로 보는 들음 그리고 행위가 아닌 그림자를 감상하는 재미. 왜냐하면 그 속에 상대의 표정을 큰 심적부담없이 짐작할 수 있기 말입니다.
만약 육신으로 일한다 하여도 목수라면 흠이 없는 재목으로 집을 질 것이고 기능공이라면 새 원료를 갖다 부어 물건을 만들고, 궁궐을 짓는 대목(大木)은 빳빳한 나무와 굽은 나무를 마다 않고 다 쓸 것이고, 훌륭한 장인(匠人)은 사용하다가 반품들어 온 Toyota 자동차의 결함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들 대목과 장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화가 항상 잘 나가는 것만이 아니고 장애에 걸려 우회를 해야할 극단의 경우를 생각해야 이 들리지 않는 라디오에서 무안당하지 않을 꺼라 생각합니다. 말 한마디 던졌다가 면목(面目)이 없서지는 걸 서울 사람이 더러 "차라리 죽는게 나요. 면목똥 가요!"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통근뻐스 차장의 호객행위에 '청량리 중량교 가요. 면목동(面牧洞) 갑니다, 어서 타세요!'란 말입니다. 토크쇼에서 Britney Spears가 수영팬티즈에 브라자를 걸치고 맨사대기로 "만약에 저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주시면 답례하고 싶은 열가지 중에서 여덟번째가 공짜로 파이(pie)를 드리겠습니다(2009)"라며 웃겼습니다. 만약에 배삼룡이 '비실비실'하며 "안령히하셰요, 배삼뇽입니다"라고 옆에 앉으면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아마 웃엇을 꺼다. 원래 이 분이 어지럼증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비실거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저는 제 누님에게 웃기는 몸짓으로 웃기는 개그맨은 인사와 유머, 조크를 구별못하는 청중을 웃기는 초급수준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정적을 깨고 배려하는 인사(人事), 초롱초롱한 유머[해학] 그리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는 조크[농담]를 이해못하는 문화권의 우리, 정확히 그런 면에 정색하며 짐짓 뒤로 물러서는 '나 자신'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Heeeeere's Johnny!"라면 방청석으로 부터 좋아라고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데 무슨 말을 할건지, 어떻게 웃겨 왔는지 몰라 저는 미리 못 웃습니다. National Geographic의 기사처럼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말 대화에서도 미소에 짜다고 보면 얼추 맞을 것 같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도 심각하고 차창으로 들여다 보이는 아시안의 뒷통수는 까만 머리에 납짝한데 추월하며 올려다 보면 오만상을 찡그리며 운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보면 밥맛 떨어져 침을 뱉고 싶은 저질?이기에 제가 침뱉으면 벌금 100불 때린다는 싱가폴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깁니다.
'사랑의 턴넬'을 쓴 단편작가 美 피터 드브리스(De Vries. 1954)가 유머에 대해 "냉소의 유머는 사냥감을 죽이고, 제대로 된 유머는 사로잡아, 훗날을 생각하여 다시 풀어주는 것과 같다"라고 직유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주접떨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편의 오해를 풀기 위해 언어희롱의 피해자로서의 당사자가 바로 나임을 눈치채고 그 오해를 풀기위해 애를 먹게 될 겁니다. 유머를 던진 사람이 재빨리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이 윗트가 인간사의 고단한 심정이지만 말 한마디로 천량빚을 갚는 것 같습니다. 어느 신하가 '왕세자가 대왕마마보다 낫다고도 하는...'이라며 말을 멈추면 사실 이러한 반토막 말에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고, 에밀레 전설. 그리고 결국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관우와 유비가 죽게 되지만, 결코 '화합할수 없는 얼음과 숯의 사이'(빙탄지간)인 오나라 손권의 농 한 두마디에 친누이 '상향'을 유비의 첩으로 내주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유머는 꽁트보다 짧은 내용의 언론이요 칼만 안든 무기요 의식의 흐름에 집적회로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이 많아지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ved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