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마른 정서. 그녀는 돈이 차곡차곡 모아지는 재미에, 고생하며 살던 과거와 비교할 때 지금이 행복하다는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굳이 이유라고 댈 것도 없지만 법과 윤리에 가치를 둘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모파상의 데뷰작품에 "비게덩이(Ball of Fat/Boule de Suif)라는 소설에서 이 포동한 창녀는 소위 이름께나 날리는 거물급들이 타는 마차에 동승하여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데 부인 몰래 자기에게 바람피우는 그 썩어 빠진 그들이 부인보다 자기에게 재미를 느끼면서 창녀만 나무라는 윤리에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섰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 이야기에서 주님이 그녀를 죽지 않게 구제해 주셨건만 감사하다고 말씀 올렸다거나 도대체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는 말도 없다. 도덕에 불감증인데다 여러 사람으로 부터 던져질 돌에 맞아 죽어질 목숨을 건져준 고마움을 느낄 줄 모르는 눈물이 매마른 여인. 왜 그렇게 무뚝뚝한 태도로 나왔을까요.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묻지만 간음한 남자의 죄는 묻지 않고, 간음한 여인을 여럿이 돌로 쳐 죽임은 죄있는 범인들이 살인하는 죄책감을 희석하려고, 마치 사형수에게 집행인 여럿이 총쏘아 죽이듯, 하늘아래 죄없는 자 없고 죄 않지을 자가 없는 걸 감추는 세상 버릇에 대해 가치를 찾을 수 없서 그 여인이 세상을 구경하고 있는데 뭐 감동먹을 일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 두 여인을 인두겁을 쓴 요부라고 보기에는 남자들의 윤리세계가 너무나 염치없습니다. '일곱번 남편을 가진 여인이 죽으면 저 세상에서 어느 남편에게로 갑니까?" "천국에는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이 없다"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곱번 결혼한 에리자베스 테일러가 죽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여인이 재혼할 땐 하얀 면사포가 아니라 연분홍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식장에 걸어 들어 오고 부인 셋을 거느린 이슬람교교인이든 재혼한 기독교인이든 신랑은 여인을 경험한 표시를 하고 입장하지 않고 그냥 처음처럼 검은 예복에 꽃송이를 예복에 달고 나오고 에리자베스 테일러의 이름은 일곱 남편의 이름을 순서대로 다 붙여 두번째, 네번째 남편인 리차드 버튼을 집어 넣어 Mrs. 첫째 남편성+두번째 남편버튼+세번째+버튼+다섯번째+여섯번째+지금 남편성을 붙여야 하는 현재의 윤리관습에 살고 있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것이 안톤 슈냑의 말처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항차 우리의 종교적인 교리와 습관, 의식의 흐름 중에 얼마나 많은 불공평한 훈육방법으로 선열반 사부님께서 외치시는 잠재의식, 무의식을 떨쳐 버리고 새출발해야 된다는 회개와 회개 후의 실천강조입니까?
우리가 어렸을 적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게 뭔지 알아맞춰 보라는 선생님 질문에 "금이요", "아니 백금입니다", "아닙니다 다이아몬듭니다"라 답했습니다. 시가로 따지면 정답입니다. 우선 그 답을 '금'이라고 해두시고 그런데 어른에게 묻는다면 금보다 더 값진 건 억설이지만 '회개의 눈물'이라고 오늘 강론이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밥통이었을까"라며 나오는 눈물의 가치가 '금'보다 더 귀할 겁니다. 이 회개보다 더 귀한 건 용서해 주고 혼자 우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할 마음을 말씀하는 분위기에 이제 우리가 한 마당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겁니다. 눈물이 매마른 두 여인보다 좋은 세상에서 말입니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ved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