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40대 중반 독신 여성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협동적이지만 힘이 들 때면 어딘가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쳐서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십년 전의 학창시절에 어떤 실수로 순결을 빼앗긴 자책감을 지우지 못한 것이 원인 중의 하나. 매우 안타까운 일.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와같이 어둡고 무거운 삶을 살아가야 할 사회적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무리수.
처녀성은 심신이 흐뜨러질까봐 권고사항.
1.
대저 양심이란 우리가 어려서 입술이 부르트게 젖을 빨 던 때에는 양심이라고는 본심밖에 없섰다. 엄마 젖꼭지를 부르트게 할 양심없는 악의는 없섰기 때문.
이 때에는 본심 안에서의 '백지 양심'.
2.
그리고 성장하면서 윤리에 대한 교육에 의해 처녀성의 정조관을 가지게 된 '흭득한 양심'관.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흥부.
아들: 아버지 나 장가보내 줘요!
흥보: 왜?
아들: 양물이 아파요. [아들의 성본능. '백지 양심']
이 때에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양심을 깨고 순결을 잃은 것은 사실상 그 휙득한 양심의 파계였고 경험에 의해 알아낸 새로운 지식이랄 수 있겠다.
특히 유산을 해야할 정도로 상대편 동물근성의 상처만 남기고 떠났다면 심신의 상처를 과도하게 받은 것.
그런데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 남자가 입을 벌려 소문에 의하여 가십에 오르자 이 여인은 다시 본연의 그 휙득한 양심으로 자신에게 죄를 묻게 되었던 것.
3.
그러나 이 것은 인간의 본심, 본성, 본능을 어긴 죄는 아닌 것
수 많은 여인의 경우 중에 안쓰럽게도 감춰지지 않고 드러난 윤리적으로 불결하다는 정죄일 뿐.
그런데 그 일로 청결ㆍ불결을 수십년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자기를 용서하여도 자기 자신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배우자를 만나 제 2의 고향이 될 곳으로 이사하면 될 게 아닌가?
되돌려 말해서 후회하고 앞으로는 다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했다면, 이 양심이야 말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참 '경륜의 양심'이라고 여긴다.
그와 같이 지극지독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라면 어디에 가서도 환영받을 자질이 구비되었다고 볼 수 있기에 정상적인 결혼이 적합할 것이고, 거꾸로 과거를 회상하며 수녀생활이나 동성애자가 안되기를 바랄 뿐이다.
기록된 바 사 1:18, 고전 15:10, 갈 5:1, 6:14~~~'멍에로 부터의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