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1세기 초입에 들어와 살고 있다. 시간이 자꾸 흘러간다. 영원히 다시는 오지 않을 그런 순간들이 점점이 연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고, 또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내가 이 시간을 의식할 수 없는 나의 때 말이다.
오늘날 物理學(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大宇宙(대우주)는 무한대와 영원으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Einstein이 처음 속도가 빛의 빠름과 같음으로써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조차 예측할 수 없는 Big Bang(대폭발)이 있었고 '에너지'는 물체를 빛의 두 자승한 속도와 같다는 공식(즉 E=MC'2)으로 세상을 상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생명의 따듯함과 밝음을 제공하는 태양조차도 바닷가의 모래알이고 수억년이면 연기로 사라지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이런 엄청난 공간과 영원의 시간 속에서 내가 잠간, 정말로 寸時(촌시)......요즘말로 '나노 세컨드'로 살다가 죽는다. 하지만 나에게도 아무리 짧지만 나만의 때가 있다. 언젠가 태양과 같이 까스로 분해되어 이 자연의 본체로 다시 歸還(귀환)하겠지......그러다 다시 어떤 물체의 한 부분, 極(극)히 작은 微粒子(미립자)로 어디에 顯像(현상)하지 않겠나 한다. 만일 재수가 좋으면 말이다. 이런 개념을 佛家(불가)에서는 還生(환생)한다고 한다. 다시금 개똥이와 또순이로 태어나면 행운아가 되겠지만, 적어도 禽獸(금수)만은 면해야 한다는 희망사항이 되고 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 왔으니 회개하고 福音(복음: 좋은 말씀)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聖靈(성령: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으로 세례를 받고 共生涯(공생애: 같이 산다)를 시작하면서 처음 하신 말씀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가 이땅에서 해야 할 자기의 임무를 가장 잘 요약하여 說破(설파)하셨다.
"때가 찼고"......무슨 때를 말씀하시는가? 이것이 오늘 아침의 나의 질문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시간이 2,000년 조금 넘고, '이사야書(서)'에서 求世主(구세주)가 이 땅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그가 내게 기름을 부우사,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 함이라. 여호와가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함을, 감옥에 갇힌자에는 놓임을 선포 함이러라" 라는 메세지를 예언한 때라야 고작 BC500년 중반에 해당하는 통털어 2,500년 전의 일이다.
하나님의 이 永迲(영겁)의 시간에서는 반딧불의 한번 깜빡임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런 순간의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순간을 두고 때가 찼다고 말씀하셨을까?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난의 노예생활에서 자기들을 구원하실 구원자가 예언한 대로 오신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나 하나님의 창조의 때에서 볼때는 너무나 짧은 그 때를 놓고 우리가 때가 찼다고 할 수가 없다. "2,500년 만에 때가 찼다...? 그럼으로 천국이 가까워 왔다!"는 말은 너무나 촌음의 天國(천국)이다. 그러한 짧은 시간에 자기 생각에 갇혀있는 죄인들과 보잘것 없는 육체의 찌들음을 풀어준다는 公言(공언)이 과연 福音(복음)일까? 나는 다음의 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物理學(물리학)적인 개념에서 시간을 따져보면 이렇게 시시한 순간이지만, 내가 사는 지금의 시시각각은 千金(천금)같이 중요한 시간임으로 이 짧은 시간을 어떻게 아껴쓰면서 가치있게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갈 수가 있는가...? 이것 만이 내게 문제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때가 찼고"라는 말은 내가 이런 寸刻(촌각)의 삶에 있어서 그 삶이 이런 限定(한정)된 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깨닫는 그 瞬間(순간)이 바로 왔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때가 찼고"는 순전히 내 자신 만의 精神(정신)태도와 내 영혼구원의 문제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죽어서 수京年(경년) 즉 억의 수억년이 앞에 전개되어 있다 한들 내게 무슨 상관이냐? 이 현재가 나에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 내 순간을 참으로 가치있는 축복의 하늘나라를 살려면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복음(기쁜 소식)을 믿으라.......현재에,
도대체 뭐를 회개하라시는가? 내가 무얼 그렇게 잘못했다고...? 회개할 것이 무어냔 말이다. 한번 따져봅시다. "나는 이렇게 잘 났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알만큼 세상지혜를 잘 집허가고, 부모에게 충분히 효도했고, 처자식들을 굶기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굽실거리면 됐지...뭐를 더 바라겠는가?" 그리고 남을 도와 줄 때도 있었지 않았나...? 기분나면 말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기 전에 세상은 돌고 돌아서 그 짧은 동안이나마 좋았던 어제가 오늘에 근심의 나날로 변하고, 오늘의 고난이 내일의 환희로 변할 수 있는 이 物理的(물리적)공간과 시간에 쫒기는 나...이 자신의 하잘 것 없음을 보라!
우리는 3살 버릇 여든까지 갈 만큼 과거생각의 노예가 되어 살아왔다. 우리의 과거가 뭐 그리 대단했오. 까놓고 말해보자. 중국놈들에게 조공바치며 나라라고 명맥을 유지하면서, 좁은 논밭떼기 갈라먹자고 양반 상놈 따지면서, 당파의 싸움질만 배운 남잡이였던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최근에는 일본놈들 앞에서 비양거기며 배운 것이라고는 아첨하며 재미보던 식민지 근성이었다. 남을 어떻게 잘 요리해서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됐지... 이 철학(?)에 사는 한국민들의 저질인생들이 서로 질투하고 무시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내 과거의 자랑할 흔적인가?
우리가 이런 根性(근성)에 매어서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사는 줄도 모르는, 이 판이다. 모두들 입만 살아서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무슨 감투꺼리가 없나 살피고, 맘에 않들면 험담을 서슴치 않는, 너나 내가 아닌가 말이다. 이런 것이 우리들의 無意識 (무의식)속에 깊이 박혀있는데도 회개할 것이 없단다... 회개를 해야 새 술이 새부대로 들어올 자리가 생기지 않겠오?
그 새술이란 것이 바로 복음인 줄, 이제야 깨닫고 성경책을 겨우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30여년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다. 그 30년 동안 나는 설교시간에 하품이나 하고 언제 이 지루한 설교를 끝낼 것인가.....? 아멘할 시간 만 기다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도 잠간씩 졸지 않았을 경우에 말이다. 이래가지고 뭐가 되겠오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