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 Earnest Hemingway
위의 말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한 말로, 뜻은, “인간은 파괴될 지언정, 패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원문을 조금 더 소개해 보면, “고통은 문제가 안된다…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파괴될 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고 되어 있다. (Pain does not matter to a man…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하여 몸이 부서져 죽더라도 계속 노력하는, 인간정신의 자유와 숭고함, 비장함이 서려 있는 이 말을 나는 좋아 한다.
동양의 노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부딪치지 않으면서 낮은데로 흐르며 삼라만상을 푸르게 하는 물과 같다.”고 했다. 동양의 지혜가 드러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국말에는, “죽은 고기만 물 흐르는데로 떠내려 간다.”는 말이 있다. (Only dead fish go with the flow.)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은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동양적인 지혜라면, 우상을 파괴하고 비진리에 도전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서양적인 자유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진리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기 보다, 서로 보완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수께서, 그 당시의 기득세력인 정치인들과 종교지도자들과 부딪치지 않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순하게 살았더라면, 예수는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때로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가난과도 싸우고, 질병과도 싸우고, 불행한 운명과도 싸우고, 불의한 사회구조와 사악한 사상과도 싸워야 할 것이다. 이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몸이 박살이 나더라도,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정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고 가르치고 있다.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Romans 12:21)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영국군에 체포되어, 21살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해 죽은, 예일대 출신Nathan Hale은 죽기전에, “목숨만 살려 주세요”하지 않고,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하고 죽었다. (I only regret that I have but one life to lose for my country.)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의로운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불요불굴의 정신력을 가졌으면 한다.
2015-04-25 04:20:01
선열반2015-04-25 (토) 23:59
얼마전에 양주동이란 양반이 계셨오. 漢文에 능통해서 자칭 天才(천재)라 불렀다고. 이 분이 한국인의 정신적 기둥을 "은근과 끈기"에 있다고 했다나? 내가 그렇게 정의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중국이란 강대국에 예속은 됐으나 독립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해왔기에 그렇게 본게 아닐까 했지를.
마치 물이 부딪치되 형상을 바꾸어가며 끝까지 변신하며 본체를 유지하는 정신이랄까? 인류의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일어났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진' 역사를 우리가 잘 알지를. 굳은 나무는 부러지고 부드러운 가지는 오직 휘어지지 않습니까?
문제는 무었을 위하야, 즉 for what cause가 문제됩니다요. 동양의 정치 및 사회구조는 종속적 체제였으나, 유럽은 지방분권제도로 이에 의한 개인주의가 발달했지요. 이런 차이에 따라 일개인의 권익이 통치자 곧 임금에게 돌아가지 않고 개개인 및 지방세력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명분이 뚜렸해졌다고. 그러나 중국과 한국은 유가정신에서 유래하는 三綱(삼강)의 으뜸으로 君爲臣綱(군위신강)이라고 까지 못을 박아야 했었던데 반하여, 서양에서는 Liberty, Freedom and Independence의 열의가 더 강했던 것이나 아닐지?
오늘날 서양화의 윤리와 문화에 젖어사는 우리에게 '파괴는 있어도 패망은 없다'는 절규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고싶오.
내가 미국시민권을 받는 자리에서 선서하기를 "미국이 존망의 위기에 섰을때 무기를 들겠는가"하는 질문에 yes라고 해서 결국 그 자격증을 받았오. 왜 그런 요구에 응했는가? 미국이란 나라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 이러한 주문이 혹 있었다면 아마 나는 망설여야 할 것으로 생각되지요. 그 이유는 앞에 언급한 중앙집권적 사회체제, 즉 개인은 朕(짐)에게 종속돼야 한다는 무의식적 통치관례를 내가 원치 않기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