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리자님께: 죄송하지만 위화감(違和感).
밤이면, 지금도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들개 코요테(Coyote)가 출몰하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는 그 있지도 않는 '개뿔(dog horn)' 천당-지옥 악마 교리의 예술적 표현 중에서 아래 두 가지 이미지를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dkp.
1. 무슬림의 공포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의 <악마의 시(詩). The Satanic Verses. 1989년> 책표지에 '허공에서 왼 손으로 목을 조르고 오른 손으로 오목가슴에 칼을 쑤셔박는 두 사람 결투' 장면. 단검에 찔린 용사의 철퇴(鐵槌 an iron hammer)는 부러졌고.
2. 로만 가톨릭의 공포심 조장:
사람에게 겁을 주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시스틴(Cistin) 성당, 신부가 강론하는 강대상 뒤에 붙여진, 죄진 사람 벌거벗겨 고통 속에 심판받는 장면 또는 보스 히에로니무스(Bosch Hie- ronymus 1450?-1516)가 그린 <악마의 환상적 그림 fantastic representations of dev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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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그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입문서에는 '철학을 해봐야 한다'고 답한다.
물론 철학이 무게가 없는 넘어 동네의 그 평가할 수 없는 불가량물(不可量物 imponderable)을 다루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기에 정신, 생명, 신(神), 착함[善], 진리를 다루는 학문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열, 빛, 진공, 감정, 여론은 다른 분야에서 취급되고, 그 본질적인 철학 테마는 일리있는 불분명한 말로 해석되어지고 있음.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였던 파스칼(1623-'62)의 유저 <팡세[생각. Pense'e. 1670>에 '철학이 웃기는 것이 정말로 철학화하는 것'이라고 힐난했고,
영국 작가, 정치가였던 마콜리경(卿)(Macaulay Thomas 1800-'59)의 <베이컨경(卿)에 대한 소고 (小考) 1837>에 '철학의 목표는 인간을 신(神)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힐난했음.
그 편심(偏心)적 재담가, 시인, 미학적 기인(奇人)이었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의 말을 부연하자면 과학이 신앙의 신비, 미학의 신비, 철학의 신비를 벗기고 있다'는 유추를 할 수 있을 것임.
사실 다빈치, 미켈란제로 시절 이전에도 조각, 건축에서 인체미학을 과학적인 해석기하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섰음.
다른 예를 들어 엘레베이터에 게시된 적정 하중을 초과하여 사람이나 피아노를 들여놓아 사고가 났다면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질 때에 사람이나 피아노, 엘레베이터 관리인을 나무랄 수 없는 것.
그 고장난 엘레베이터에 갇힌 사람이 기도를 하여도 지혜자의 입에서 나온 신(神)의 말을 모르는 엘레베이터는 말이 없고,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까닭은 하중이 초과되면 그 엘레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즉, 마구 싣지 않는 것이 사용자의 생활철학이 아니라 생활윤리인 것.
예를 들어 풍랑을 만난 배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까닭은 비록 그 배에 물이 채워져 삐걱거리며 좌초할 뿐이지 큰 물고기를 준비(1:17)하신 하느님이나 용왕에게 빌어도 요나의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은 설명으로, 불가사의한 신(神)을 철학에서 다루지만, 모르는 것을 더욱 불분명한 어려운 말로 설명할 뿐,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신앙은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 대한 생활윤리 항목.
종교의 교리는 그 불분명한 사실에 대하여 섭리를 주재하는 명령자가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추리를 계속 묶어놓은 일종의 율법이 아닌가?
(종교)철학자는 철학이 철학이 되기 위한 이유가 일일히 없다고 말함.
펭귄은 빙산 위에서 발이 왜 얼지 않는가?
이는 펭귄이 착해서가 아니고 팽귄이 종교철학적으로 빙신(氷神)이라서가 아니고 발가락의 동맥이 정맥으로 곧바로 이어져 대기 중으로 대류와 전도가 적게 일어나기 때문에 동상에 걸리지 않는 것이지 펭귄의 발이 전혀 차겁지 않은 게 아님.
그 깊은 바닷 속에서 꿀꿀(croak)대며 알을 낳을만한 적당한 곳을 찾는 조기[굴비 croaker] 알이 8만개가 되는 것은 다산(多産)의 영험이 있서서가 아니고, 거의다 잡혀먹히기에 그 정도 알을 낳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진작 멸종되었을 것이고,
그 3000년 전 이집트 제 18왕조에서 소똥벌레(kheper. scarab beetle. Scarabaeus sacer)를 신 (神)으로 모시고 그 형상을 가슴에 단 이유는 '소ㆍ말똥 속에 알을 낳아도 부화되는 그 질긴 목숨의 모델이 무병장수의 속성'으로 오해하고 있섰기 때문.
이로 볼 때 종교철학은 미몽(迷夢), 사몽(死夢)에 몽유(夢遊)하고 있지 않나라고 여기는 바입니다.
마구잡이 총질하는 무슬림, 넉넉하게 폭격하는 가톨릭-개신교 국가, 그리고 .... 종단.
이해할 수 없는 미로의 교리 계단을 계속 쌓아올리면서 말입니다.
이 것이 요즈음에 악화되어가는 종교전쟁 트렌드의 동기요 점입가경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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