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이르는 것인가?", "깨달음을 이루는 것인가?"이 둘 중에 서로 옳다고 쌈박질.
그 경위는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깨달음을 이해의 영역으로 규정'하는 글을 내자, 같은 조계종단 전국선원수좌회(공동대표 현묵ㆍ정찬 스님)가 현응 스님의 글은 조계종 종지 종풍이 훼손될 수 있는 문제라면서 더 어려운 말로 반박성명을 내는 것.
그런데(이 '그런데'가 중요함) 그들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점.
이에 대해 부처님이 이미 쉬운 비유로 둘 다 필요하다는 법문이 있음을 잊고 있기에 아래와 같이 증거를 대면서 수련을 계속하라고 권면하는 문구를 쓰는 바임.
................................ 아 ............ 래
앞 선 말씀이 있으면 이를 인용하여 최대한으로 쉽게 이야기 해야 할 것.
1. 불교는 돌아가(歸)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돌아갈 귀', 사물의 끝 '귀歸', 환소(還所)
법화경 신해품(信解品). 데려온 탕자의 이야기. 아들이 깨달음에 이른다.
마치 도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XII 1880>에서 '무법적인 우리로 하여금 각자에게 안전하고 깨달음과 문명으로' 미망(迷忘)의 무명(無明)에서 깨어나는 예화라고 할까?
2. 불교는 깨달음을 이루는 성(成, 成器)이다. 이룰 '성', 마칠 '성成'
마치 에밀리 디킨슨 시(詩) <# 113 1839>의 백지[白紙, 白知識, blank]에 축복, 은총으로 채워지는 것 처럼.
같은 전게서[묘법연화경] 방편품(方便品) 제 2에 붓다는 달마의 왕이라고.
그 달마(Dharma 達磨)는 법이요 최선의 언행. 최고로 향한 문은 항상 열려 있음.
Dharma means the code of conduct which is supported by the voice of the inner-self. It is the golden message of God[god].- Bhagwad Geeta p. xxiv
깨달음을 이루는 예화로 pali, 장노게주(長老偈註 Theragatha Atthakatha)의 세로나(Serona).
세로나는 부요한 집의 아들.
그가 지혜의 눈을 얻으려고 무진히 노력하는 걸 붓다가 보시고 '그 방법은 거문고 줄을 조율하는 것과 같아서 너무 당기거나 헐겁게 하지 말아야 제 소리를 얻는 것 처럼 잘 알아서 지혜의 경지를 중도로 이루도록 하여라.'
이러한 보편성에 대하여 심약(沈約) 역시 말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러므로 사실 깨달음에 이르든, 이루든 과정을 말한 것 뿐이 아니던가?
빨리 깨달으면 돈오(頓悟), 늦으면 오직 점수(漸修)의 차이 뿐.
따라서 금강경: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행혀 코끼리 한 부분을 만져 보고 서로 다툴 이유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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