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모르는 제 말씀이 어려워도 이렇게 그냥 써나가고 싶습니다. 곰곰히 천천히 써 올리겠습니다.♡
한국인 사상 중에서 신앙의 굴곡된 물결들(infractuousities):
'여러 남자 신앙과 동서하는 한국'(groupie)은 죽어서 어느 남편을 만나게 될까요?" "죽으면 장가가고 시집가는 게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정신적인 지배민족(Herren volk)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진앙의 태풍안(epicenter)에서 살고 있서 왔습니다.
우리들의 선조는 어쩌면 기마민족, 유목민으로서 농경사회에 이르르며 북방신화를 거쳐 단군신화-대종교, 주나라 주례를 수입한 만신사상인 샤마니즘,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유불선-기독교, 무(無)종교... 혼합종교역사를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군성조를 우상으로 하는 대종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까닭은 신들(gods)은 인간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하나님, 하느님'(God)이 계심에 대해서 '대조영' 가제(家弟) '대야발'이 편제한 우리나라 고조선 '삼일신고'에 분명히 터득한 바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총명하고 정직함이 하느님의 개념을 이미 알아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환언하오자면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 풍작을 거두는 씨앗이라 비유한다면, 우리 선조는 삼위일체 벼리를 갈파했던 까닭에 당연히 수확량이 예상외로 많아질, 말하자면 삼위일체 조직신학의 후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의 신앙서적은 너무나 짧고 어렵기에 성경에 나오는 사례를 우리가 받아드리고 있는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의 그 그물로는 바다에서 쓰이나 물을 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바다 물고기를 바다물에 키우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근세사(史)에서 이 혼란한 시대, 난해한 종교, 숲속의 떼판같은 복잡성 속에서, 마치 촘촘한 어망 중에 그물의 벼리를 찾았다 기독교가 들고 일어났다고 보겠습니다. 신앙질서를 찾는 부단한 노력 끝에 서양문화에 의해 하느님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한국인에게 한국인에게 아르쳐 드릴 하느님을 찾는 노력이 성취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에게는 이미 유일신개념의 피가 흐릅니다. 텃밭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역사를 모르면서 목회자가 자부하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니라 오히려 덜 떨어진 면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오듯, 굳건한 반석 위에 모스꼬바 크레믈린 궁전이 지어지듯 태풍한파에서 견디는 모방없는 왕궁을 우리 자신이 지어야 합니다. 까닭은 사대주의적 신앙체계에는 패권이 숨겨져 있기에 공정하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자신의 배경인 선조들을 모르는 이에게는 실제로 외세에 그리 당해 왔구요.
그러한 풍한(風寒) 중에 종교의 정치적 실수에 대해서만 시대적, 지정학적인 처지를 떠나 하느님을 잘 찾아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적어도 삶과 죽음의 섭리를 잘 받아드리며 세계에 옳바른 종교이념을 선도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가정하에 말씀합니다.
까닭은 제가 풍성을 기대하고 부탁할 만큼 여러분들이 기가 막히게 총명하기 때문입니다.
1. 신앙생활에 지역적인 편견이 없을 겁니다.
신앙에 종속근성으로 향수적인 느낌, 귀소본능, 탈취한 물자를 조국에 헌납하는 행위, 물길을 자기 논밭으로 끌고 가는 아전인수, 신앙을 국부론과 국토방위 이념으로 포장하는 행위가 없서야 종교가 공번되고 우주적 섭리에 접근할 겁니다. 정신적 지배민족은 종족근성(tribalism)이라고 욕을 먹지 않으리라 보기 때문입니다.
서구세력의 치열한 탐험경쟁시절에 원주민을 선구이주민(Sooner), 남녀불문하고 동정녀(Mary)라 부르고, 약육강식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원주민의 땅을 콩 주워 먹듯(pot shot), 무인도에서 진주조개 껍질을 발견한 것 처럼 유럽에 돌아가 떠벌리면 그 땅을 가질 수 있서, 마치 여호수아가 손가락질하면 '다 가질 수 있는 땅'(Tom Tiddler's ground)의 시절에 자기 나라를 부강시켰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러한 행위는 기독교나라가 예수님 뜻대로 사랑을 베풀지 않아 교회가 없는 원주민은 사람대접을 못받아 그들의 안중에 없고 그 땅덩어리는 마치 새별(nova)을 발견한 것 처럼 유럽에 보고했던 역사가 증명합니다.
2. 인간의 기본욕구를 저버린 개별종교의 정치적 실수에 대하여
신앙은 인정욕구와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는 기본욕구라고 생각합니다. 기본권에 속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문화, 정치, 과학 이전에 기본욕구요, 착하게 살려는 도덕적인 추구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형이상학 장르요, 자신, 자아를 감별하려는 욕구요, 식욕-성욕-성취욕구와 같은 스스로 인정하는 인정욕구라 여겨집니다. 신앙의 윤리적 가치를 진리라고 부릅니다.
신앙교리는 의탁사항이 아닙니다. '소 식'이 기록한 바, '인간이 계획하나, 그 가늠은 하늘이 한다'는 '모사재인 성사재천'(Man propose, god dispose)이라며 그 것은 인간의지를 넘는 의식에서 출발한 신에게로 향한 의탁사항이 아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신앙의 표적은 우주섭리이지 그 표적이 결코 타인종이 아니어야 할 겁니다. 여기에 백인들이 역사적으로 정치적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전도[전교]는 믿음의 숙성에 도움을 주는 감정이입(empathy)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앙욕구를 비윤리적으로 이용하거나, 억압하거나, 말살하려 할 때 그 시대적인 종교전쟁이 일어나겠지요. 그 전쟁은 패륜이요, 살아서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입니다. 교만한 백인에 의한 자신의 국가에 의한 자신의 국가를 위해 백인국가끼리 싸우고, 유색인종지배사상(baaskap)으로 피로 물든 역사였습니다.
제 생각에 그들의 인종차별적인 실수, 백인들이 신앙의 차이를 악용하여 당대발복하려는 소치, 그들의 양심에 반하여 그들의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북치는 전투소리(ranz des vaches), 신앙이 굴곡된 흉흉한 태풍을 일으키며 크리스챤은 '문명인'이요 '인간'이요 '점잖게 말한다'며 오만했습니다.-Let's talk like Christians.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객관적인 정면사 '문명. ..'을 저술한 아놀드 토인비가 '흑인에게 영혼이 없는 것 같다'란 망말을 했고, 그 훌륭하다는 의사겸 선교사 리빙스턴(1857)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아프리카의 문은 열려 있다. 상업적이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해 나는 아프리카로 돌아간다'라는 내용으로 명연설한 것으로 백인사회에 기록되어 옵니다.
우리나라에도 쳐들어 왔습니다. 1832년 '이양선' 출현 이후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대포를 쏘며 쳐들어 온 포함외교(gun boat diplomacy)가 아니라서 우리는 그래도 아프리카 원주민보다 대접을 받았기에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단의 나라'(1880)를 저술한 유태계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Ernest Oppert.1868)가 흥선대원군 가묘 덕산 남원군묘를 도굴하려 했고, 대포발사가 오고 가는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터져서 그들 백인의 오만무도함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가 저개발국가로 머물게 된 이왕조 말기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만을 나무랄 수 만은 없겠끔 백인이 나빴습니다.
그러므로 허물어지는 특정한, 또는 모든 종교인의 그 타락을 나무란다고 하여 소시민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는 까닭은 육신에 묻어, 육신과 떨어져, 죽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는 영혼을 알게 하고 이해하게 하고 준비된 허무에 흐느끼는 깃발소리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세상의 굴곡된 믿음을 바로 잡아 마땅하고 다수종족이 모여진 우리 국민은 그러한 영적훈련으로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한 능력과 총명함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에게 죽음 후에 부활하는 능력이 있든 말든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날이 되시기를. ved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