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춥다는 첫 울음인지, 태어나자마자 탯줄 잘린 환자의 아픔의 울음인지 모르지만 공짜 애정으로 보살핌으로 그 한 삶이 시작된다. 아직은 절해고도, 고해바다의 신세가 시작된다는 앎은 없으리라고 본다. 이 때 부자집에 태어났으면 좋았섰겠지.
그런데 어느 부자가 3개월 밖에 더 살지 못한다고 진단되면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왜 나에게 암을 걸리게 하셨나'라고 영탄하는 글을 접한다. 그렇다. 만약 자신을 뺀 나머지 세상사람들이 입이 없는 하루살이처럼 내일 다 죽게 된다면 그는 군말이 없을께다. 까닭은 그가 자신을 남과 비교할만큼 철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기본욕구를 채우면서도 남보다 오래 사는 것이 과연 행복인가? 꼭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누구는 굵고 짧게 잘 살다 죽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출세욕구, 성욕구, 애정, 애착심, ..
그러나 사실 이 욕구는 중독일지 모른다. 이 중독증의 하나만이라도 떠나 사는 사람들이 어쩌면 세 부류가 있지 않나 싶다.
첫째는 독신생활자, 그리고 희한한 동성애자들
둘째는 그 알 수 없는 중독, 미련이랄까 집착,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죽음에 대해 도저히 알 수 없서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의 가르침을 배워나가는 크리스챤
셋째는 자신을 두꺼운 돌팍에 보중하고 남을 사랑하는 불자
그런데 호의호식하고 집만 없는 사람은 드물고 의식주 해결이 다 원만치 못한 비참한 사람들이 홈레스들이리라. 기독교에서는 비참한 상황에서 신의 은총이 시작된다고 믿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그 비참함이 원래의 각자 몫이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므로 홈레스를 도와줌이 처음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애정을 공짜로 받았던 것처럼, 그들 또한 공짜로 도움받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자비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다 아는 탕자의 이야기는 법화경 신해품(信解品), 루가 복음, 소크라테스가 아들 람프로클레스(Lamprocles)와의 대화(산파술)를 기록한 크세노폰의 '알키비아데스', 프라톤의 '심포지움'에 나온다.
그러나 이들의 예화처럼 망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부자 아버지가 계시는 홈레스는 극히 드물다. 거의 대부분이 부모형제, 친지는 물론, 사회복지제도의 도움이 요구되는바 그들의 가난구제는 사실상 나라도 못한다는 옛말이 있는 것처럼 보런티어들의 자비의 손에 십시일반의 필요함은 두 말이 필요없는 잔소리다.
그러므로 초월하는 정신이 아니고서는 홈레스를 거두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 열린마당의 에스터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이다. 누구는 존경하지 않는다고 했담? 예 제가 고맙다고 올린 글일 뿐이지요. 까닭은 천국은 침노하는 이의 것이요, 남을 돕는 마음은 천성이 아니고서는 거짓착함의 계속적인 반복으로 자신의 천성이 착한 것으로 보여질 때까지 착한 행실로 천선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지춘향이도 춘향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