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올린 제목은 6430 '내가 항상 부정적인 글만 올린다고'라고 독자에게 묻는 '알렉산더 최'에게 대한 댓글입니다. 안심해도 좋을 알렉스의 글 내용입니다.
첫째로 이 양반은 누굴 휘어잡을 듯이 글을 올리는 느낌이 들고
둘째로 댓글 올라온 중에서 그 어느 하나를 붙잡아 침소봉대, 확대해석하여 독자(여론)의 정(情)에 호소하는 격(檄)같고
셋째로 노상 판에 박힌 다음 소재로 전화벨을 울리게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 (유일)신을 믿는 건 헛된 일이요, 바보들의 행진, 다수의 횡포.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불교, 기독교에 다 있지요. 불교에서 그 없서져 적멸함은 그 것이 본래 있음도 아니다라면, 기독교에서는 그 없서짐을 승화시키지요. 이 것이 두 가르침의 차이라 여기지요. 어느 쪽이든 죽음의 공포로부터 초연할 것을 가르치지요. '하느님의 아들(son of God)'만 하늘에 오름이 예수님의 말씀이요, 민초가 극락에 간다함은 후일에 가미한 지장경, 무량수경으로 귀류법 윤회사상이지요.
이 것이 말씀인데 말씀과 교리를 혼동하여 교리를 비난한다면 교리를 경전말씀으로 착각한 '동일시의 오류'겠지요. 인간의 상식적인 면에서, 이성과 논리적인 원칙[측면]에서 (볼 때) 종교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받아드릴 수 없는 (교리에 기대하는 건 헛된 일이요,) 옛날 미개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맹종, 맹신하는 건 완전히 감정적이요 습관적이다라고 평하는데 이는 종교의 자유와 생각을 박탈하려는 것이지요.
신을 안 믿는 것도 '없는 것을 없다고 믿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칼 맑크스의 '공산주의 선언내용'으로 보아 '소멸의식을 가진 종교'이지요. 그가 불교를 몰라서 그렇지 똑 같이 소멸의식이지요.
인간 이성과 논리적인 서구인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허구(虛構), 다시 말해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 '너희가 모르는 신이 하느님이시다'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드리지요. 기독교 이념을 오용한 탐험─원정시대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이상한 신비적인 교리, 목사님의 성전건립기금─십일조 강요에 역점을 조금만 두시요.
알지요, 칼 맑크스, 조금은! 그리하여 (그 언제나 남을 끔찍히 위한다는 기독교 말로써) 노예제도 폐지 후에 미국은 일개 가장제(家長制)국가가 됬고, 미국이 그 소멸의식으로 사라진 후에 모두가 혼란을 겪게 될 것이고, 현대 상업과 문명의 철저적인 붕괴가 초래할 것이고, 미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이라 말했지요.
즉 기독교정신으로, 국민의, ~에 의한, ~을 위해 세워진 현 미국민주주의 이념을 비평한 겁니다.
그런데(이 '그런데'가 중요하지요) 그 칼 맑크스는 왜 흑인을 '노예가 되어 마땅한 흑귀(黑鬼)'라 말했고, Lassalle는 유태인을 '유태 흑귀', 이집트를 탈출한 '유태마귀"라 왜 불렀나요. 알렉스 최가 이 분들의 유물사관, 사회주의 경험을 표명하는 것☎과 같아서 말입니다. 그 맑크스는 기독교는 청초지(淸楚地. 천국)를 표방하는 소멸소유(消滅所有) 종교라고 ≪공산주의선언≫에서 갈파했으니까요. 설령 그렇지 않다 하드라도 자기 편이 아니면 안되는 겁니까? 칼 맑크스 역시 "유식한 목사에 성령 자질이 있다면 말 안하겠다" 했지요.
☎http://www.marxists.org/archieve/marx/works/1862/letters/62_07_30a.btm ☎≪The Poverty of Philosophy ─Chapter two - Part 1≫: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7/poverty-philosophy/ch02.htm
제가 엊저녁에 TV를 보니까 부인을 옆에 두고 일곱 남편이 각기 같이 살아온 30년 이상을 회고하는데 부인은 하나도 남편이 주서 섬기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더구만 각기 말이 끝난 다음에 무심한 부인을 껴안아주는 걸 보니 그 한국 남편이란 모두 빙신?같더라구요.
하지만 그 허풋하고 빙신?같은 변명 속에 쓸만한 조리가 있습디다요. 이를 일러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이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