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아들이 출세한 의성김씨 문충공파에서 "부서지는 옥이 차라리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 있지않으리!"라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분이 학봉 김성일(金誠一).
이 분은 승승장구하더니 41세에 홍문관교리, 다음 해에 사헌부장령이 되어 부정부패를 척결하더니 46세에 암행어사가 되어 황해도 순무어사로 파송나간다.
그가 사간원 정언(1573)으로 일할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당 현종이 방현령과 위징에 묻듯 "짐은 전대의 어느 임금에게 비유될 수 있느냐?"고 하문하자 그가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언고?" "이유는 전하는 타고난 자품이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되시는 것이 어렵지 않사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스스로 성인인체 하여 간언을 거절하니 걸주가 망한 까닭이옵니다, 전하."
이에 임금의 안색이 변하자 서애 유성룡이 나서 "요순은 임금을 인도하는 진언이옵고, 걸주는 경계하는 말씀이오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말씀" 이라고 하여 화를 풀고 술을 내어 경연을 마쳤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AD 1573).
이 김성일 선생이 남으로 부터 칭찬받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하루는 그가 유생에게 말했다. "내 평생에 한 마디 말이라도 허물을 말해주는 분은 이 분이 나의 스승이요, 내 잘난 점을 말해주는 사람은 이 분이 나의 도적이니라.-오평생득일어 도오과자시오사요, 담오미자시오적이니라(吾平生得一語, 道吾過者是吾師, 談吾美者是吾賊).
그런데(이 '그런데'가 매우 중요함) 이 분이 참수형을 당할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 조정에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이 쥐와 같으니 염려할 것 없다"고 보고하자 당파싸움에도 진력이 난 안일무사주의 조정대신들이 이 말을 듣고 예정된 임진왜란 방비책에 나태해지게 되버려 십만양병설을 부르짖었다는 이율곡 국방론이 무색하게 되었고, 퇴계학파인 김성일로 인하여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는 이율곡의 처지를 불쌍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과연 임진왜란으로 침공당한 조정에서 방위에 게을러지게 한 책임을 물어 김성일을 체포하려고 금부도사가 내려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상황판단을 잘못했음을 인정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자발적으로 서울로 올라 갔다.
그가 충청도 직산에 이르자 왕이 그에게 경상도 초유사로 제수하여 진주대첩을 이끌고 진주공관에서 숨졌다(1593. 4. 29).
그는 정치신념이 변함없섰으나 상황판단을 잘못했을 때 죽임받기를 각오했고, 보속하여 전투에 참여하고 순직함으로 인하여 후일 그에게 공훈이 추서되어 그의 큰 잘못을 가렸던 것이었다. 까닭은 그는 밉게 굴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