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가깝지 않은 분이 오늘 돌아가셨다.이 분을 세번 만나 이 분이 출간한 책이며 그 <6ㆍ25와 나의 인생>의 글을 두 번 잘 읽었다고 하여도 나를, 그 다음에도 내가 붕어처럼 보이는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하는 분.
그러나 이는 상관 없고, 이 분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한을 풀지 못한채 췌장암 발병 9년에 돌아가심에 내 마음 한 구석에 박정희 군사들에 대한 미움을 금할 수 없음.
영령이 좋은 곳으로 안주하시길 빌 뿐.
이 분은 마치 장인환이 '조선을 일본이 다스리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스티븐슨을 오크랜드 패터 역에서 확인사살한 후, 25년 언도 중 11년만에 가출옥되었서도 이승만이 본채 만채, 대통령에 당선되고 다른 이에게만 독립유공자로 포상하고 1957년 83세 탄신일 이후 하야할 때까지도 그 장인환의 인물값을 인정하지 않음이 생각나게 하는 분.
병으로 서거하자 샌프란시스코 교민이 사회장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 1962년 3ㆍ1절에 건국공로훈장 추서(複章).
까닭은 재미교포들의 헌금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에게 변호를 부탁했으나 기독교 교리, 정치 야욕적인 학업을 핑계되면서 냉혹히 거절했기 때문.
그러한 박정희 자신 역시 이성과 열정의 내부 싸움.
열정이든 이성이든 하나가 죽어야 되는 줄로 아는 인생.
바보같은 짓으로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이 李옹같은 역전의 용사들이 없섰더라면 박정희 역시 대통령으로 당선될 민주한국이 없섰을 것.
이 분은 1951년 4월 22일~6월 10일까지의 북한 6개군단, 중공군 3병단 35만군사를 만나 우리 3군단이 1개군단 병력을 잃고 강원도 인제-현리-방대산-광원리 이남으로 후퇴하던 관측장교.
그런데 박정희 혁명군사정권이 원충현 대령의 반혁명 사건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씌워 남산 분실에서 두둘겨 패며 고통 속의 그를 희생시켜 버린 것.
한국전 용사에게 포상을 하지 못할 망정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닉슨대통령을 만나러 왔을 때에 자원봉사자 사진작가 이 李현덕 중령이 "제가 이현덕입니다"랐을 때에 고개를 돌리더라는 것.
그 전투 때에 이 옹은 3군단 98포병 대대장, 박정희 준장은 3군단 포병 사령관.
이 때 미군에 예속된 한국 7사단 5연대가 이옹이 소속된 우익에 알리지 않고 후퇴함.
중공군 제 9병단 3개군과 인민군 3개 군단이 양익으로 아군, 유엔군에게 포위작전을 펴, 중공군 180사단이 크게 손실을 입으면서 (남)조선 4개사단이 섬멸.
그 참한 이옹이 군사혁명에 무슨 잘못이 있으리요?
박정권이 망쳐 놓은 인생, 그 동안 '교민의 자상한 할아버지 역(役)'.
고국에서 알아주지 않는 이 이현덕옹의 교회장을 샌프란시스코 교민의 사회장으로 해야 마땅.
참으로 안타까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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