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뽈레오닉 전쟁에 프랑스-스페인 33척 연합함대에 맞붙은 넬슨의 27척.
10-21-1805. 월요일. 밀물ㆍ썰물 차이가 심한 '사리'(음. 8월 29일). 청명.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 '트라팔가르 곶'(Cape Trafalgar)에서의 돛배 싸움.
33척 적함대 "─→"진로를 넬슨이 대담하게 12~13번 째 함대 사이를 끊어 버리기.
넬슨의 마지막 일기는 격전 전날인 일요일 20일 오전 7시에 남남서풍, 오후 8시에 서서서풍.
10월 21일은 청명. 대기압 1,030밀리바, 02시에 북동풍, 03시에 북서풍, 05시에 남서풍, 07시에 북서풍, 09시에 남동풍, 10~12시에 남서풍, 13시에 남동풍. 26일에 995밀리바, 트라팔가르 곶 지역의 폭풍.
돛에 바람 갈피를 잡기 어려운 폭풍 시작일.
넬슨은 함장기 5번을 단 영국황실(Royal Sovereign)호에 승선한 부제독 콜링우드에게 스페인 산타 아니(Santa Ani) 함대를, 테메레(Temeraire)에게 리도우더블(强盛號) 후미를 공격시키고,
...................................................... Collingwood, 테메레 함장 William Mallord Turner, Redoutable號
그는 5개의 마스트가 달린 사령선 빅토리 후갑판(quarterdeck)에 몸을 싣고 지중해로 진입하는 프랑스 빌레노에비 사령선 부센트(센타우르) 號와 리도우더블 (강성호强盛號) 사이를 뚫고 나감.
................................ 넬슨의 Victory號, Villeneuve 함장의 Bucentaure號
그 프랑스 사령선 앞에는 136포문의 길이 61.3미터 성3위일체(Santissima Trinity) 스페인 함정.
콜링우드는 어디로 갔나? 배가 포위되어 공격받아 사면(四面)이 파괴됬다며 뒤로 후퇴함.
그는 탁월한 전술전투력이 없는 보통 직업군인. 목숨과 바다의 구렁텅이(海壑, 해학)를 무서워 함.
언젠가 물었다. "넬슨은 겁이 없군요?" 이에 넬슨은 "아닙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넬슨은 이 번에 프랑스 빌레노에비, 레블리가 패전하면 툴로(Toulo)로 퇴각할 줄을 예견했음.
해군소장 레블리 본명은 피엘 두만와 레블리(Rear-Admiral Pierre Dumanair le Pelly).
'툴로'는 마르세유(마세이) 동쪽 66 km 지점의 몰운대 다대포 같은 지형의 시에이스 폰스 레이 플라이아스(six-four- les-plages)의 '툴로'만(灣) 천연 요새.
그러나 넬슨이 죽고나서 콜링우드는 프랑스 해군이 '툴로' 요새로 귀선하기 전인 11월 4일의 올테갈 곶(Cape Ortegal) 전투에서 그들의 퇴각 작전에 한 번 더 승리를 못하고 놓치고 만다.
이에 콜링우드가 없자, 넬슨이 하오 2시에 빅토리號에게 불리한 남동풍을 받으며 남동쪽에 있는 리도우더블(Redoutable)號에게 근접조우 시도.
이에 넬슨의 사령선을 빤히 보고 있는 리도우더블호 후장루(後檣樓mizzentop)에서 정확히 발사한 포환(musket ball) 충격을 넬슨이 맞아 수 시간 후에 절명.
이에 콜링우드 부제독이 제독으로 트라팔가르 전쟁을 수행.
이어서 스페인 테스나로스(Cisneros 'thesnaros') 제독이 승선한 사령선 그 성3위일체號는 돛을 내리고 나포됨.
스페인 카딧(Cadiz) 곶에서 지중해로 출항한 당시에 5,029톤,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배.
마치 안토니가 지중해 악티움(Actium) 곶 이오니아 바다에서 (죽기를 각오한 이순신 노량해전처럼 배수진을 친) 옥타비아누스에게 포위된 그 당시에 가장 아름다운 250톤 돛단배 옥타리에스(Octaries) 함정처럼 나포됨.
그 넬슨은 돛 함대로서 프랑스-스페인 돛함대를 상대로 승리로 이끌음.
그 후 일본제국 야마모토 이수루쿠(山本 五十六, 1884-1943) 제독.
나구모 추이치(南雲 忠一, 1887-1944) 제독이 항모 1척, 전함 5, 순양함 2, 구축함 7척의 함대로 하와이 진주만 기습에 쾌거를 올렸지만, 지금은 이 위에 스커트 미사일. 장사포 및 북한이 개발에 성공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에 요격 미사일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
한미군사협정에서 한국의 핵개발 필연성을 재론할 때가 되었음.
그리고 재래식 전투는 뱃치(batch) 싸움. 즉, 전함에 한 번 탑재한 포탄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아가야한다.
그러나 현대전은 부단한 포탄, 급유 및 식량공급의 수송이 따르는 연속 공정(工程, Continuous process)이라야 최후 5분 전에도 승산이 있음.
그 프린스턴大(1921-1923) 타몬 야마구치(多聞 山ㅁ, 1892-1942)는 항공모함 히류(飛龍) 함장으로 USS Enterprise 항모에서 출격한 공습기(American dive-bomber)를 화력 부족으로 막아내지 못하여 1942년 6월 4일 하오 5시에 " ∫ "자 순항으로 도주함.
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 平八郞, 1848-1934)가 러시아 포병출신 발틱함대 지노뷰이 피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Zinovi Petrovich 'zyinovyui pyitrovyich' Rojeseuteubenseuki, 1848-1909) 함장을 대한(Tsushima) 해협에서 "T자를 가로 지르기(cross the T)"를 연속공정 전법으로 무찌름(5-27-1905).
그 마지막 러시아 함대를 독도(獨島) 근해까지 추격.
그러므로 독도는 일본보다 우리나라에게 전략적 가치가 큼을 알 수 있겠음.
이어 전승연회에서 이목의 집중을 받아 질문에 답하기를 "넬슨과 비교될 지 모르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마라'고.
까닭은 이순신 장군은 열악한 상황에서의 뱃치 전투에 포탄과 수병(水兵)의 목숨을 아끼는 전술로 승리했기 때문.
그러므로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님.
호랑이 입 "툴로"와 "다대포(多大浦)".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벌리지 아니한 때가 있섰음.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加藤 淸正)가 재차 우리나라에 침공, 부산광역시 몰운대(沒雲臺)) 안에 요새를 구축.
이 Ω 지형 입구에 포대를 설치하고, 역시 일본 수군ㆍ육군에게 공급항 병기 창고를 설치.
이 곳을 쳐들어가라고?
그 때에 2중 첩자 요시라(要時羅, 가케하시 시치다유, 梯七太夫).
그는 대마도 출신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통사(通詞) 겸 유키나가를 기요마사보다 출세시키려는 모사꾼.
그는 가토 기요마사와 이순신의 전투로 이 두 사람에게 타격을 주려고 경상도 좌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 머지 않아 다시 온다며 이순신을 출병시킬 것을 권유했지만 이순신이 출병하지 않자, 이 번에는 '출병하지 않았기에 그가 무사히 다대포에 들어와 진을 이미 쳤다"고 김응서에게 반간계를 구사함.
이를 보고 받은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출병을 명령하자 이 장군이 다대포 상황에 이미 세불리하여 출병을 안하자 선조는 그를 "명령을 어기고 남의 공을 자기의 공으로 거짓 보고한 죄로 죽어 마땅하다"는 미련한 어명을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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