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누가 떠가랴?마음을 담은 이 몸을 떠갈망정 이 내 그 마음을 누가 떠가랴!
자(子)가 말하기를 '3군사의 장군을 체포할지언정, 병졸의 향하는 뜻을 빼앗을 자가 있느메뇨?'─ 불가탈지야(不可奪志也).
그 아무리 영특하고 돈 잘 벌고 뻔뻔해도 상대편의 굳은 마음의 무기를 내려놓겠끔 흥정을 해야.
나 먼저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게하는 소년같은 마음으로 돌아가듯, 내 자신의 마음의 무기를 호수에 씻어야 상대의 말머리를 돌려놓겠지.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가 섞여져야 그의 마음과 섞어진 내 마음을 퍼낼 수 있겠지.
그 자(子)가 살았을 때 욕심쟁이, 수하에 9천명을 거느린 억척스러운 깡패도둑 도척(盜跖).
자(子)가 그를 회유하지 못한 이유는 의(義)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
오히려 그 자(子)는 자기 뜻대로 출세 못하고, 두 세번 초영윤(楚令尹)이 된 육웅의 후손 손숙오(孫淑敖)에 대하여 그는 타고난 품성(品性)에 조용히 여쭙는 품성(稟性)이 있기 때문이라고.
출세 못한 그 자(子)는 남에게 화이부동(和而不同)하라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이 차이불화(差而不和), 교도적이었기에 다른이의 마음의 호수에 자신의 마음을 담그지 않았음.
어느 누구의 뜻대로 이 세상에 죽었다 깨어나게 하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고, 새로운 이름을 땜질 (braze)할 뿐, 오직 진보만 있을 뿐.
새 이론 역시 앞의 것을 융합(welding)하여 다른 겉모양의 변혁(paradigm shift)을 창조했다고 일컬을 뿐.
그러므로 변함있는 그 창조란 개념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유무식의 소통의 장을 의미.
그러기에 우리가 성군이라 부르는 세종 임금은 소통의 기구로서 재위 30여년 동안 신하와 1,898번의 경연(經筵)을 열고 소통의 도구로서 그 당시에 쓸만한 진덕수(1,178-1,235)가 쓴 <대학연의>와 주희(1,130-1,200)가 쓴 <자치통감>.
그 소재가 대비짜루 양녕(讓寧)대군 몽둥이도 좋고, 개국공신 아들부터 도사 이곡, 매부, 처남, 은접시 만드는 장인 39명을 유혹한 유감동(兪甘同)의 마음 읽기도 좋았다.
그로서 풀며 신하들의 마음과 활발한 소통, 여민고락[與民苦樂]을 함께 한 것.
까닭은 몸을 잡는 것은 오직 상대편의 기름진 때허물[진구塵咎]을 쥐는 것.
그 어디로 향하는 상대편 마음은 젊음, 살핌, 군사(軍師)적 물 흐름이기에 이 물줄기를 잡아야 할 것이기에.
........................................................................................................ 감사합니다. 올림. 7-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