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음덕에 얹혀살면서 조금만 노력하면 편해질 걸.
그 비유로 하얀 소나무[백송]와 하양~등갈색 엷은 껍질의 자작나무의 수명을 비교하면 적절하지 않을가 싶음.
그 소나무(Pinus albicauris)는 처음 줄기 껍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500년을 살지만, 흰색~등갈색 종이껍질을 가진 자작나무(birch. Betula utilis)는 오래 살아야 소나무의 1/10 밖에 못 삽니다.
소나무는 크면서 기둥이 굵어져 껍질이 뜯어져도 앞선 껍질을 겉에 붙이고 살지만, 자작나무는 껍질을 얇은 종이같이 벗겨 이거(移居)시키는 특성으로 면역력이 떨어져 일찍 죽는다고 할까.
해마다 보호막 콜크층이 누적되는 레드우드(red wood. 朱木)는 천년 이상의 수명.- 주천년한불매체(朱千年寒不賣體. 주목은 천년 추위를 견뎌도 몸을 팔지 않는다.)
그 레드 우드를 로무루스, 박혁거세가 심었다면 로마제국과 신라 왕조가 끝날 때까지 살고, 왕건이나 이성계가 소나무를 심었다면 고려왕조, 이조왕조가 끝날 때까지 산다는 비유.
이 말씀이 조상에 얹혀사는 사람이 번영한다는 의미라면 도서관과 인터넷은 조상의 음덕이기에 자작나무처럼 옛 지식을 계속 벗겨버리지 않고, 소나무처럼 책과 인터넷의 내용을 두텁게 읽으면서 후손에게 두텁게 읽으라고 유훈을 남기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그 온고이지신이라고, 그 껍데기에는 숨은 이야기, 동기와 시련, 시행착오와 극복의 과정, 모르면 어디를 찾아보면 된다는 지혜와 조상의 흔적이 있기 때문.
책과 인터넷은 야단치지 않는 스승이자 교수법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아도 되는 교재 도구.
혹시 그 플라타나스처럼 옛 껍질을 뱀처럼 완전히 벗어버린 다음 오히려 그 자리가 상처가 되어 병리적인 연한 껍질이 옆 나무와 붙어 그들 여섯 그루가 기형적으로 아예 붙어버린 구경꺼리도 보았습니다.- Bonfante's splash garden. sycamore. gilroygardens.org
까닭은 앞 선 조상의 철학 껍질을 벗겨버림으로 다시 던져진 존재로서 신선한 상처가 되기 때문.
이에 풍상우로의 시련, 고통, 울화로 인한 산화(酸化)에 쉽게 노출되어버린 셈.
대저 대화빈곤을 메꾸어주는 학문은 남의 흉을 보지 않게 풍부한 소재를 보태주며, 우리가 모를 때 알아내는 지혜의 검을 주기에 모르는 사물을 이 곳 저 곳 쑤셔보는 도구가 되며, 예절을 걸끄럽게 하지 않기에 대화를 통하여 창업자의 동료가 될 인맥을 안겨주고, 한 평생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우리의 삶에 책과 인터넷을 통한 보충수업으로 무엇인지 모를 그 도(道)를 절차탁마하는 지름길이라고 여깁니다.
그 베토벤이 비록 하이든에게 하나도 배운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책을 통하여 약속사항인 기본음표의 공리, 만년에 가서 하이든에게 감사했고, 네페로부터 시상(詩想)을, 알브레히츠벨거로부터 양 손가락을 다 써서 피아노, 바이올린을 다루어 화음을 내는 대위법*. 푀르스터로부터 작곡법을 배웠다는 초년고생은 분명합니다.
*대위법(對位法. counterpoint). 혼자서도 하모니를 내기 위한, 예를 들어 오른 손은 '솔', 왼 손가락은 '도'의 음정을 동시에 내는 화성적 양손잡이 기법, 이 쪽은 '테너', 저 쪽은 '알토' 합창 짜임새(homophonic texture)인 다중 성부聲部 (many-voiced)를 가진 음대음(音對音), 점대點(punctus contra punctus) 작법, 연주법.
이로서 서구음악이 단순 멜로디 동양음악보다 콘설토, 심포니 오키스트러로 장족의 발전을 함.
만약에 이 세상에 책이 없다면 책을 지은 옛 사람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베토벤이 작곡하게 된 동기와 자신의 각고의 노력과 실패, 굴하지 않는 용기의 과정이 주변에 숨은 이야기가 뭉쳐 드디어 그가 영원한 악성(樂聖)이란 이름을 남기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그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그의 기록을 남긴 책과 인터넷에 올려진 정보를 통하지 않고는 어떻게 그를 보는듯 할 수 있을까요.
책이라도 그렇지! 우리가 어떻게 도서관의 그 많은 분량의 책을 살 수 있습니까?
여기에 인터넷을 통한 지혜의 조감적 위력의 습득 방법.
예를 들어 이 번주 한국일보 발언대의
1. 뉴욕지사 논설위원 연창흠氏의 '세 번 생각하고 말하기(三思一言)'란 글을 잘 읽고, '찬불가'(註 讚佛歌. 1920 조학유 작사) '향심(香心)'에 그러한 내용이 기록되었는가의 유무를 심심풀이로 인터넷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
"어떤 오(5)해라도 세(3) 번 생각하면 이(2)해가 된다. 그런 이(2)해와 이(2)해가 모일 때에 사랑. 5-3=2, 2+2=4.
즉,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행동하라.- 3思1行.
그러나 그 찬불가 향심에 없고, 의정(義淨. 635-713), 김욱(金旭. 949-?)이 남긴 지권(1010년 간), 이규보(李奎報.1168- 1241), 정율(廷律) 스님의 뜻일 겁니다.
이러한 불가(佛家)의 법문을 제 3처(處)에서 객관할 수 있는 책과 인터넷의 능력.
3번 고려해본 다음 행동하는 계문자(季文子)가 있다는 말에 공자가 '두 번이 옳다고'.- 재_사가의(再_ 斯可矣).
그 증자가 말하되, '스승의 도(道)는 충실한 진정성과 동정심(충서忠恕)', 즉, 나와 상대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확인할 수 있섰고.
2. 이어서 '개에 물린 사람은 반나절만에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뱀에 물린 사람은 3일만에 치료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의 말(言)에 물린 사람은 아직도 입원 중이다'라는 말에 대하여
답은 '아니다. 연 논설위원이 잘못 말했다'고 채점할 수 있는 것
이 근거로는 그 의정(義淨:635-713)의 인도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도 없는 것 같기에.
사실 그 개념은 '사람의 말(言)이 아니고', '사람의 입 속에 사는 세균 및 바이러스가 얼마나 독한지 사람 이(齒)에 물려 피가 났다면 반드시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들의 말을 다르게 옮긴 것일 뿐 <찬불가 향심>의 내용이 아니었기에.
3. 시애틀지사 고문 윤여춘氏의 하퍼 리(Harper Lee) 여사 지음 <To Kill A Mockingbird>의 평설에서 막킹버드, mockingbird(개똥지바퀴科 '입내 새')를 '앵무새'로 알고 <앵무새 죽이기>로 한역된 제목이 잘못임을 지적했기에 저 역시 그 새가 무엇인가를 확인해볼 흥미를 느낄 수 있섰습니다.
4. 그 선불교 제 2대 조사인 혜가(慧可)가 평스님이었을 적에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라면서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말할 때까지 '인간의 마음은 이 지축의 정 가운데에 솟아오른 히말라야 어딘가의 수미산(須彌山)에 있다'는 전설.
이에 선사가 그의 마음을 고쳐주려고 '네 마음을 가져오라'는 한 마디에 마음은 자기 안에 있다는 걸 즉각 깨달은 제자.
이 역시 '가까운 나 자신을 다스리고 엉뚱한 먼 곳을 가깝게 하라'(근공원린近攻遠隣)는 역설.
그 달마선사는 성깔없는 조용한 한 마디로 혜가의 도둑과 같은 그 불안감을 일시에 묶어 죽여버립니다.
'스승이 그 허상의 수미산을 파버리고 갈아 없애준 법문'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것.
그야 물론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고증, 객관이 지나치게 중요하다는 게 아니고 학문적으로는 아전인수로 끌어다 붙이는 인용의 옳고 그름에 대한 정밀성을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 감사합니다. dkp 올림. 7-2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