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오.” 신파쪼는
이렇게 시작했다만, 우리들의
조상은 이렇게 노래했다.
靑山裏
碧溪水야 수이감을자랑 마라
一到滄涇ᄒᆞ면
다시 오기 어려오니
明月이
滿空山ᄒᆞ니수여간들
엇더리
우리
사람들은 사랑이라면 황진이의 사랑을 연상한다.
그러나 2,500년
전에 희랍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Eros라고
定義(정의)했음을
우리가 안다. 그러하다면
나훈아가 안다고 한 사랑이란 고작 요것 뿐이었던가?
실상 그렇지가
않다.
자식사랑은
내리 사랑이란 말이 있다. 아니면
부모사랑을 어찌 다 이루 값으랴?
이것을 위로
향한 사랑이라 할지 모르나 분명히 그런 종류의 느낌이
있다. 영어로
filial piety... 그러나
특별히 구별해 주는 우리말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Plato는
이런 사랑을 Agape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학자들이 여호와의 사랑으로 둔갑시켜 꿰어마추다
보니, 오늘날의
한국기독인들은 그런 줄 알지만,
실상 그는 그런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구먼.
하매,
友情(우정)이란
뭐냐? 이것도
사랑에 해당한는가로 머리를 갸웃둥하겠지만 분명히
거기에는 사랑의 감정이 끼어들어있다고 봐야 하겠지비.
비록 우리조상들은
이런 것들을 얼버무려서 '사랑이라고
카고 마~치왔부라'
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들은 감정이 메말라서 "사랑'이라
하면 나훈아의 노래를 들먹인다.
그러나
우리가 꺼떡하면 줒어섬기던 孔子의 朋友有信(붕우유신)을
다섯 五倫(오륜)
중의 하나로
사랑의 문제를 우리 사람들은 처리했더군.
풀이 하면,
달(月)
아래에 섰는
두 육신(肉身)은
서로 믿음(trust, confidence)이
있어야 한다는 쪼인데... 이게
친구가 가져야 할 사랑입네까?
희랍철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philia 라
부른다고.
옆어치나,
자처치나,
남을 생각하고
아껴주는 감정이란 얘기로 낙착된다고 하자.
그런데 어째서
우리 민족은 이러한 감정의 복잡다단 함을 무시했을까?
아니면 귀찮아서
아예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이러한 KISS, 즉
Keep It Simple, Stupid 철학의
근본원인으로 종속적 사회체제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네가 네
罪(죄)를
알렸다' 하고
곤장 몇대를 때리면 될 것을 우짜 시끄럽게 하는고...,
요고가 아닐까?
아니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위에서
임금으로 부터 그 아래 천민에 이르기 까지 군소리가
필요없던 시절을 우리가 살았다.
그런데,
희랍인들은
어떠했는가?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Athene 이란
소도시국가에서는 시민의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었던 고로, 이런
막무가내의 동양적 一罰百戒(일벌백계)가
있을 수가 없었던 거라. 따라서
사랑의 문제, 하긴
이것이 인간관계의 전부라고 말해도 시원치 않은
영역인지라 구분할대로 구분해서 혹시 잘못 알고 덤비는
일이 없어야 했던 것이다.
어떤 장물애기가 하는 말이,
<유대사상의 목표가 쓰여있는 탈무드의 기초를 세운 Hillel이라는 분이 있섰느니라. 그가 말하길 출애급 21:24, 레위기 24:20 내용을 잘 새겨들으면 율법의 근본에는 자비의 필요, 즉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시켜줄 말이 필요하다 싶어 예수님보다 100여년 전에 황금률을 가르쳤으니 그 말이 바로 "네게 해로운 것을 너의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그 나머지는 해석이다. 자- 어서 가서 공부들 하거라'라는 말씀이 Shabbat 31a에 씌여있노라.>
이봐, 남의 것 잘 훔치는 녀석아! 누가 그걸 모르냐? 탈무드의 기초를 시작했다구? 그가 유태교의 이웃사랑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한다면 말이된다만, 구약 그 자체는 '에스라'(Ezra)가 기원전 440년에 '느헤미아'왕의 명에 따라 구약을 읽음으로 해서 구약성경의 기초를 세웠다. Hellel(본명을 가마리엘이라 하더군)이 그 사랑의 뜻을 꺼집어 내어서 유명한 구절로 했을 뿐... 그 후대의 신약의 집필자들이 예수의 입을 통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바꿔서 말했던 바다. 글구, Shabbat 31a의 어느 구절에서 이 말에 반대되는 언급이 있었는지도 말해보시지.
참고:The exhortation to love peace emanated from Hillel's most characteristic traits—from that meekness and mildness which had become proverbial, as is seen from the saying: "Let a man be always humble and patient like Hillel, and not passionate like Shammai" (Shab. 31a; Ab. R. N. xv.). Hillel's gentleness and patience are beautifully illustrated in an anecdote which relates how two men made a wager on the question whether Hillel could be made angry. Though they questioned him and made insulting allusions to his Babylonian origin, they were unsuccessful in their attempt (ib.). In the anecdotes about proselytes in which Hillel and Shammai are opposed to each other, Hillel's mildness and meekness appear in a most favorable light. In a paradoxical manner Hillel praised humility in the following words (Lev. R. i. 1): "My humility is my exaltation; my exaltation is my humility" (with reference to Ps. cxiii. 5).-The unedited full-text of the 1906 Jewish Encyclopedia에서 인용
언젠가 기독교의 사랑이란 것이 위선자들의 헛소리라 하길래, 하도
웃기는 소리인지라 "뭣
좀 알고나 떠들라"고
했었지를. 이
者가 내어뱉는 소리가, "조또
모르는 넘이... 뭐
어쩌고"... 하길래,
Erich Fromm이란
심리학자 및 철학자가 저술한 The
Art of Loving 이란
책을 한번 읽어보고 나서 다시 대화하자고 했었지.
물론 그런 것이
있는 줄을 알턱이 없는 걸 내가 잘 알지만 말이야.
그
책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랑에는 조건부
'사랑'이
있고, 무조건적
love가
있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뭔가 댓가를 바래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리 한다고. 그러나
애비된 녀석은 '자기의
位相(위상)을
높혀주는 자식이라야만 사랑한다는 겁니다요.
나는 아들이
없으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지만 말이야.
전혀 아들에게
기대할 건덕지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떤이에게는
그게 않됐던 모양입디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마태복음의 "돌아온
탕자"에서
잘 표현해 주고 있지요. 둘째녀석이
아버지가 번연히 살아있는데 상속할 것을 미리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갔다가 다 탕진하고 돼지들의 죽을 나누어 먹다가
드디어 고향을 그리워 했다나?
터덜터덜
돌아오는 그 탕자를 먼 발치에서 발견한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소잡고 양잡고 잘 먹여놓고는 손에는 금가락지와
금비단의 옷을 걸쳐주었다는 겁니다.
<참고:
돼지는 유태인들이
가장 禁棄(금기)하는
동물이고 '먼나라'라는
말은 '삶의
의미를 모르고' 허랑방탕하게
살았다는 뜻임.>
이
꼴을 보던 큰아들이 분통이 터져서,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열심히 일해왔는데,
내게는 그런거
하나도 해주지 않았다는 시비를,
아니 누구
말마따나 비판을 했더니, 애비가
하는 말이 "너는
나와 함께 있었으니 모든 것이 다 네것인데,
새삼스럽게
무시기 것을 내어놓으라는 거냐...
하기는.
아들이
머슥했겠오? 천만에...
요는
아버지, 여기서는
여호와, 의
사랑을 한번 잃었다가 되찾아 본 사람은 그 인자하심이
망극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는다는 축복의 얘기이고,
늘 충분히
가졌어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者(자)는 항상 불평하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요.
요런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제가, 저
혼자서 獸也靑靑(독야청청)한다는
착각과 그 오만, 여기 누구처럼... 그런
한심한 넘들 데리고 뭐 曰可曰否(왈가왈부)
하는 내가
그르다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하니 손가락에 무좀이 생길 우려가 있는지라,
깐죽거리는 이태백같은 인간들 앞에 다시 나서게 되는구먼.
너무 유식한
척해서 미안합니다. 괜찮겠지요?
한 세상 내
맘껏 잘 살아보자 하니 무척 힘들구먼.
禪涅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