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관사(寺)를 거쳐 올라갔던 북한산으로부터 하산하려고, 멀리서 이 곳을 보면 마치 산허리가 누리끼리하게 가리마타진 것처럼 보이는 비탈길을 내려왔다.
돌이 발에 차여 굴러가버리고 발자국에 땅이 다져지고 밟힌 풀뿌리가 죽으면 길이 되던 언덕 중턱을 내려 오면 꼬불꼬불한 소로길에 흙 밭 길. 폭이 넓어지며 장소가 시작되는 현대 뻐스 종점.
마치 시인 강정의 종점 단상.
혼자 멀뚱히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는 데서 오는 격절감이 치미는 듯도 싶고, 시간이 왠지 다르게 흐르는 듯한 나른함과 이질감을 느낀다고 표현했다.
나는 그런 이질감을 어느 장르의 작품감상에서도 느낀다.
그 찰스 다윈과 나뽈레옹 3세 이후에 나타난 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
마네(Manet). 드가(Degas), 세잔느(Cezanne) 등으로 끝났단 말인가?
절차탁마가 아니요, 선율을 조율하려드는 게 아니고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 조각가는 기형아와 파괴된 자연을 애써 상징물로 세우고 '느끼는 바가 없냐고' 묻고,
작곡가는 식문화 속의 쓰레기 깡통을 두두리는 소리를 심볼로 하여 귀를 따갑게 하고, 화가는 인간미를 발기발기 찢어 언챙이, 지진아, 기하학-反기하학적인 데쌍을 출품하여 나로 하여금 그들의 예술감각과는 달리 점점 퇴조와 역사적 뒤안길로 내가 숨어가는 괴리감을 느끼곤 한다.
그 까닭은 선진화 전자공학 픽셀문명 속에서 나로 하여금 그들 인상파, 추상파, 야수파, 점묘파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
현대 속에 나는 무교양, 무개념으로 살고 있는 느낌.
하지만 벼룩도 낯이 있다고, 내가 반기를 들고 싶은 것은, 어찌하여 그 전의 작품을 세밀히 관찰하면 그림 속에는 뼈를 그리고 난 연후에 근육을 그리고 피부를 묘사했다는데 왜 지금은 채료를 뜯어보면 캔버스 쪼각밖에 없느냐는 점이다.
그 잘난 피카소의 귀신작품을 포함하여 아주 쉽게 엉터리로 그리지 않는냐는 의심이 간단 말이다. 자연미가 없서진 변곡점, 불연속, 직선화된 선분의 조형.
전위문학에서도 주어, 목적어 빠지고 완전자동사,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더냐?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기 전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풍자했듯이 '열렬한 예술지상주의자는 거의 예술상의 변태, 혀 대신 음표를 받아 물고, 질 안에는 활자를 구겨 넣고, 목구멍에 음식 대신 물감을 우겨 넣는 자들.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는 엉뚱한 것을 밀어 넣으려는 자들'.
예를 들어;
차라리 그가 나에게 미술전람회 입장권이나, 명화, 명작을 사진 찍어 선물할 것이지
1. 손으로 그린 달력(Hand-drawn calendars),
2. 집에서 숙성시킨 잼 냄새나는 향수(Hom-brewed cologne that smells like jam),
3. 코바늘 뜨게질로 만든 행주(Crocheted washcloths) 부스러기들을 모은 콜라주(collage)를 자기 스타일이라면서 의도적으로 그 쪼각들(flagments)을 캔버스 위에 몽타주(montage)하여 내 마음에 선물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런 고물상 작품은 나신의 명화를 감상하고, 고전음악을 듣던 내 귓구멍에는 거지 깡통소리, 나의 눈에는 발병신 E.T. 보다 더 괴물, 내 손 끝에는 가증스럽게 살아 돌아 온 중환자로서의 부상병의 감촉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오감, 육감의 거세자일까?
그 어느 쪽 감성이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
그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폐허 속에서 라생문(라쇼몬 羅生門) 앞에 서 있는 머슴, 그리고 선(善)과 미를 묘사하는 대신, 라생문 속의 잔인함과 이기심을 묘사한 지옥변상(地獄變相)을 우리 눈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종말론자, 폐허 속에서 불휴의 명작을 남긴 허무주의, 데카당, 퇴폐주의와 함께 구역질나는 예술지상주의를 가증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 dkp 올림. 5-3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