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역사적 사항을 두 번 다시 실수 없는 은감불원(殷鑑不遠)으로 삼기를.
1.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러시아 스탈린과 손 잡은 걸 후회했다.
2. 해리 트루만(945-'53). 전군최고사령관
There was nothing passive about Harry Truman.
He was the commander in chief in law and in fact. - George Elsey
1945년 8월 1일경, 상부의 지시를 받은 펜타곤 딘 러스크(Dean Rusk) 대령은 막료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과 공업지대 북한 1,000만 인구, 농업지대 남한 2,000만 인구, 북위 38도선(38선)으로 갈라 놓으면 북한 땅이 조금 넓지만 얼추 비슷하다고 보고서 작성.
이를 미국주관으로 열린 유엔안보이사회에서 러시아가 불참한 가운데 9:0으로 통과시킴.
3. 국무장관 에치슨(Acheson)의 모토는 구전으로 전해내려와 머피법칙으로 알려진 '넘어질 건 넘어지리라',
....제 33대 미대통령 트루만의 그 것은 예레미아 애가 1:12 '이 것 또한 지나가리라.'
4. 남북한을 그 38선으로 갈라 북한을 러시아, 남한을 미국이 신탁통치했지만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를 애초부터 무시한 실책.
1946년 1월 7일.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자격으로 신탁통치는 '망국음모'라고 성명서 발표.
그러나 동년 3월 21일 미국, 러시아는 신탁통치 강행 제 1호 성명서 발표.
이로서 첫 단추부터 잘못 잠그게 되어 1947년 11월 14일에 신탁통치국에서 감시하에 남한 홀로 총선거 실시.
다음 해 1948년 5월 10일 선거 실시. 5월 31일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으로 당선.
5. 트루만 독트린 전후에 그 에치슨 국무장관이 극동에서의 방위에 일본열도까지만 포함시키고 한국을 빼버림.
이에 마살(Marshall, George C.)의 보좌역 그 딘 러스크가 미군이 5년간 한국을 점령했기에 한국동란에 미국이 책임이 있다고 발언.
6. 트루만은 확전반대, 한국에 경제군사 원조 주저.
Truman: "I don't want to go to war!"- 자서전 780쪽
국부군 장개석에 $2billion을 투입했지만 아무 실적이 없이 국부군이 공산군에게 내쫓김.
이에 에치슨 해고여론이 들끓음.
그리고 최초에 러시아 군수물자로 북한이 침략한 한국동란이 발생하자 미국이 '한국군의 실력은 마치 보이 스카웃이 독일 팬저(Panzer) 탱크에게 수류탄 던지는 격'이라고 평하면서 참전을 주저.
미국이 H bomb까지 개발했지만 중공군 인해전술로 1951년 1월 4일 후퇴작전에 MacArthur 장군이 만주, 중국 중요도시에 원폭 30~50개를 투하하여 중국공산당을 발본색원하자고 했지만 트루만이 전군최고사령관인 대통령 권한에 월계(越階)한다고 해임한 실수.
7. 주한미군에게 감사하면서도 맥카터의 건의를 받아드리지 않았기에 마치 새 차를 현찰로 구입하지 않고 월부로 사들인 결과 이자 포함하여 미국이 엄청난 지출을 하고 있는데 대하여 감사?
그러므로 호미로 막을 수 있섰던 북한이 강성화되고, 시진핑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된 것이 아닌가?
.................................................................................................... 감사합니다. dkp 올림. 10-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