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의 아난, 부처님 평화 사역
아난(Anan阿難)존자는 부처님의 사촌이자 제자.
그가 우물가를 지나다 마탕가(Matanga*) 출신의 파카티(Pakati)라는 이름의 소녀에게 마실 물 좀 달라고 청했다.
*인도의 '4계급; 브라만, 크사트리야, 바이샤, 수드라' 이외의 마탕가는 귀한 집과 천민 사이에 낳은 여식.
계급차이 귀천상혼(貴賤相婚 morganatic marriage)이 아닌 바람피움[야합]으로 낳은 자손.
파카티: "오 사제님. 저는 너무나 비천하고 하잘 것 없는데 물을 어떻게 드릴 수 있나요?"
아난: "나는 계급제도를 말한 게 아니고 물을 달라고 했다."
이에 그녀는 행복하여 가슴이 뛰며 그에게 물을 바침.
그리고 아난다는 떠났는데 그 소녀가 먼 발치로 그를 따라옴.
이 말을 들으신 부처님에게 그녀가 '오 부처님 저를 도와주세요. 아난다가 사는 곳에 저도 함께 살게 해주시어 그에게 교화받게 하고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에 부처님이 그 소녀의 감성을 아시다.
타고난 본성적 느낌(original sense 정서)에 자신의 이해득실이 얽혀진 의식(feeling)으로 인한 감성(emotion), 즉 무명(無明 avidya ).--
자스민이 (시든) 꽃잎을 떨구듯 집착과 애증을 버리지 못하는구나(법구경 제 377장)
"파카티야, 네 가슴은 온통 사랑으로 채워졌구나. 그러나 네가 네 감성을 이해를 못하는구나.
그 것은 아난다가 너를 사랑한다는 게 아니고 그의 친절.
그러면 그 친절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 행하거라.
너의 신분으로 다른 이에게도 그리 하거라.
진실로 말하거니와 고결한 어느 왕이 노예에게 친절하다면 그 왕은 덕이 있다는 뜻.
그 때에 그 노예가 고생해온 잘못된 걸 모르고 선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면 그의 큰 장점.
그가 비록 힘이 없지만, 그의 압제자를 저주하지 않고 그의 오만함, 거드름피우며 마구 대함도 자비와 불쌍한 마음으로 대해준다면 말이다.
파카티, 너에게 축복이!
너는 천출이지만 귀족, 귀부인의 귀감이 될 것이다.
네가 하천한 계급이지만 사제[브라만]들도 너에게서 배울 점은, 옳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너의 모범으로 말미암아 왕비의 영광이 빛나게 될 것이다.
그 처녀가 살아가는 정도(正道)를 아르쳐주심. _卍_
Burnouf: "Introduction a L'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p. 205 Paris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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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의 주님의 평화 사역.
요한복음 4장 1절~42절에서 예수님이 수가(Sychar)라는 동네에 다섯 남편이 있섰고 아는 남자가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얻어 마시며 믿음의 정도(正道)를 가르쳐주심.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할 때에 야곱의 우물곁으로 거쳐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오자 주님이 물을 좀 달라 하시다.
이에 그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으로 그 어찌 상종하지 않는 [유대인이 아니어도 서로 결혼하는 습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나이까?' ...
이에 주님이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인이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나이까? ... 야곱도 이 물을 먹었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크십니까?'
이에 주님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걸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이에 여인이 '메시야,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이에 주님이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이라 말씀하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 것이니라.')
이에 여자가 동네에 들어가 '주님이 나의 행한 모든 과거를 내게 말하였다'고 전했지만, 사람들은 이 여인의 증언보다도 사마리아 사람이 주님의 말을 친히 듣고 참으로 그가 세상의 구주(救主)임을 앎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게 되었다'고 말함.
사람들에게 신앙의 정도(正道)를 아르쳐주심. _†_
삶과 믿음의 중점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믿음이 삶의 목적인가?
일주일 전부터 교회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중 아이가 열이 쩔쩔 끓는다면, 약속대로 교회에 나가야 합니까, 애를 데리고 긴급한 '이머전시'로 병원에 가야 합니까?
아니면 교회에 연락하여 준비한 행사물을 당신대신에 교회로 운반해달라고 해야 합니까?
집안 경사 결혼식이 자녀들을 위한 축제인가, 축의금을 회수하려는 공정한 의식인가?
자녀가 싫어해도, 목사, 신부를 주례로 함이 교인에게 축의금을 더 냈던 이유에선가?
"교우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고린 전 7: 29-31"
이 말이 옳습니까, 말세를 파는 목사(gloomster)가 옳습니까?
올바른 삶이냐 믿음이냐?
이 모두 이상형, 이 이념과 실제계는 긴장관계가 있고 대립 저항하여 현실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둔다고 합니다.
그 올바른 삶도 어렵고 신앙도 어렵고 그 가운데는 사랑.
널뛰기할 때에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이 내려오듯.
사랑이 이상과 현실의 지렛목*, 알키메데스 점(点).
올바른 삶의 목표, 신앙에 반드시 따르는 종속적 가치관.
그러므로 잡보장경 불가의 보시, 고린도 전서 바울의 사랑.
이 모두가 사랑을 승화시킨 가르침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막스 살렐(Max Scheler 'sha'ler' 1874-1928): " Der Formalismus in der Ethik und Die Materiale Wertethik", p. 267, Halle Printing 1921
번역자; Manfred S. Verlag von Max Niemeyer(1882-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