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중도(中道. madhyama pratipad);
불가의 공설(空說)이라는 것은 허무라든지 부정(否定)이 아니고, 세상 사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가짐으로 없다고 하는 마음을 깨고, 있다고 하는 가설도 깨고 그 가운데에 옳음이 있다고 여기는 자세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편견 없는 변증법적 실천철학.
그 중도실천하는 예화를 땟목이 바다로 흘러가는 유수(流樹)에 비유.
이 벌목(筏木)이 곱게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는 방법론.─ 잡아함(雜阿含) 12권 유수경(流樹經), 42장경(章經), 선가화두(禪家話頭) 흑씨범지(黑氏梵志) 방하착(放下着)
큰 통나무가 이 쪽 강변(斷)에도 부딪치지 않고 저 쪽 강변(常)에 도착하지 않고, 물 속에 가라않지도 않고, 파도가 일렁이며 가슴을 뛰게하는 주저(洲渚)에 닿지 않고, 물이 둥글게 굽이치며 나루터에서 놀다가자는 회복(洄洑)에 가지 않아야 넓은 바다로 향할 수 있는 바, 이 쪽 강변은 눈, 귀, 코, 혀, 마음, 뜻의 육입(六入), 저 쪽 강변은 육식육근육진(六識六根六塵).─ 법화경注
공자의 중용(中庸);
도(道)는 어짐(仁),
이 어짐(仁)은 서로 나눔.
사물을 절반(中)으로 나눔이 어렵기에 충서(忠恕)로 나아감이 도에서 가까운 것.-논어 이인(里仁). 증자(曾子), 자사(子思)
그 진북계(陳北溪)가 말하기를 충(忠:中+心)은 자기 속 마음을 다하고, 서(恕:如+心)는 자기 마음과 같이 남의 마음을 알아 사물을 베푸는 것.
그러나 남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같다고 여기고 내 마음으로 미루어서 겨우 아는 것(推己), 이로서 남을 알아주는 서(恕)
이 것이 중용. 공자의 도(道)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
여기에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개념과 다산의 해석이 필요할 겁니다.
송유宋儒 주자학파는 '인의예지' 모두가 '재심지리在心之理', 즉 마음 속에 있는 이理라고 관념론에 사로잡혔지만 공자가 안자에게 가르친 '극기복례위인'이란 '자기를 이겨내서 예를 회복함을 인仁을 함이다'.-다산 맹자요의孟子要義
즉, '인의예지는 이를 행한 후에 이루어진다. 때문에 사람을 사랑한 연후에 인仁이라고 말하지, 사랑하기 전에는 인이란 말을 하지 못한다. 나를 의롭게(義=善+我), 착하게 하지 않으면 의義라고 이름할 수도 없다'라는 충서적 다산철학의 중용론을 이룩합니다. 실천없는 중용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란 의미겠지요.
그러므로 '인仁'이란 '인을 행함', '위인爲仁'으로 성립되며, 여기에서 '위爲'란 '힘을 써서 행함用力行事'의 뜻이며, '손을 대서 도모함著手圖功'이니 마음 속의 탁상공론이 아니라고 성대 박석무 석좌교수가 주석을 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지계(中道持戒. middle path self-discipline);
니코마케안 윤리(Nicomachean Ethics).
덕에는 두 가지.
하나는 시간이 걸리지만 남을 기르쳐서 얻게되는 지적 덕목.
또 하나는 버릇으로부터 얻는 도덕적 덕목.
행동하여야 정당성을 얻고, 자제로서 극기를 얻고, 용감함으로써 용기를 얻고.
그러나 가장 좋은 도(道)는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이유로, 적당한 비율로 양극 사이에서 과유불급이 없는 중도(the mean).
까닭은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 처하면 두려움과 확신, 용기와 비겁함, 갈망과 노함, 기쁨과 고통, 자제와 방종, 낭비와 열정적인 성격이 나타난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흔한 일이기에 나중에 칭찬받을만한 갸륵한 행위를 남기기 위하여 경우에 따라 중도를 벗어나서 좀 넘치게, 또는 좀 모자라게 처신하여야 한답니다.
그 이유는 중도를 찾는데 가장 쉬운 길이며 옳은 도(道)일 수 있기 때문.
그러나 사상과 언행을 처리하는 획일적 언론탄압인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BC 213-?206).
또는 Sabazios("Zeus") 신전의 골디안 매듭(Gordian knot)을 풀려고 하지 않고 칼로 쳐서 끊어버리는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BC 333).
이 것이 때때로 중국인들과 서구인들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그들의 조상이 경험한 흔적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