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삽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전체의 안녕을 위하여 각자에게 '질서와 양보'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개인의 이익이란 이러한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미 유리한 위치에 선 사람들은 기득권을 한껏 누릴 것이고, 거기에 끼지 못하는 축은 이래 저래 밀려나는 신세에 빠지겠지요? 그렇게 굳어진 사회체제에서 늘 양보만 하다가 보면 자신의 이익을 확보할 길이 막연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찾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여기에 개인과 사회가 갈등하는 기득권의 싸움이 생기는 겁니다. 강자는 더욱 강해지고, 약자는 낙오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다가 보면, 그 공동체가 요구하는 협력의 정신이 파괴될 수 밖에 없읍니다. 여기서 강자를 규제하고 약자를 도와주어야 하는 사회정의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지만 한 사회와 또 다른 집단과도 같은 맥락의 우열이 생김으로써,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한 집단이 협력 면에서 더 우수한 단체에게 피해를 볼 수 있는 일이 생기겠지요. 씨족이니, 부족이니, 도시니, 국가의 형태로 확대해 볼때에는 항상 다른 모임으로 부터 열등한 위치의 사람이나 집단은 늘 위험을 받읍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격려해야 하는 공동체의 法이 필요하게 되고, 또 人倫의 道德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러나 三綱五倫(삼강오륜)이란 유교전통의 가치가 희미해지고, 서양의 기독교 정신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모두에게 어떤 뚜렸한 가치관을 주장할 수도 없고, 또 세워보려고 해도 먹히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法治理念(법치이념)이 道德에 우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사회질서나 개인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佛敎니 기독교니 하는 종교가 인간의 본능적 갈등을 해결하여야 할 정신적 필요성이 생기는 겁니다. 法哲學이란 학문이 있는데, 이러한 三角關係(삼각관계)를 두루 살펴서 法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를 다루지요.
이러한 고려를 다했는데도 사회의 계층 간에 크고 작은 마찰을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왜냐하면 앞의 세가지는 결국 기득권자들이 양보만 하는 약자를 누르고 더욱 자기 세력을 휘두르는 하나의 방책으로 굳어지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다분하기 대문이지요. 기존의 사회질서에서 도태되거나 낙오된 사람들은 결국 기존체제의 희생된 사람이냐, 아니면 그런 환경에 적응 못하는 개인적인 능력의 문제로 주어진 기회의 균등을 즐길 수가 없는 것인가?
그래서 사회정의를 부르짓게 되었고, '칼 맠스'가 내세우는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이런 불공평한 사회정의를 바로 잡고자 약자인 '노동자,농민이여! 단결하자! 그리고 자본가란 기득권자를 넘어뜨리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70년의 실험에서 공산주의의 이상적인 정의구현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읍니다. 그 이유는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개인적 자기본위의 본성을 공동체 전체를 위하여 너무 많이 희생시켰기 때문이지요.
이 실험에서 깨닯은 사실은 집단 안에서 우수한 자들로 하여금 전체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 살려야 주어야 전체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생각이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패권과 기득권을 인정해 주고, 이들 실력자 간의 경쟁을 통하여 사회 전체가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도을 찾자는 움직임이 정당화 됐던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형태이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란 경제체제라고 부릅시다.
문제는 개인의 본능을 조장하면서 전체의 이익을 살리는 길입니다. 거기에는 앞에 말한 강한자를 규제하고 뒤처진 자를 도와주는 그런 法과 道德이 嚴定해야 하고 그런 正義가 구현돼야 합니다~ 이겁니다. 만일 그 공동체가 이런 정신을 무시하고 이미 잘 나가는 사람과 그 공동체를 억압하다 보면, 개인의 특출한 면을 잘 활용한 외부세력에 정복 당할 것이고, 개인이 자기이익 만을 주장하다 보면 다른 구성원들에서 배척을 받는 외톨이가 되겠지요.
결국 한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이 서로를 돕는 그런 정신에 바로 서야 그 개인도 살고 그 공동체도 건전해지고...국가도 부흥발전해서 모든 국민들이 잘 사는 그런 집단이 되지 않겠읍니까? 서로가 서로를 돕는 정신을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衆生의 求濟"라고 부릅디다. 남을 도우려면 자기의 희생이 전제돼야 하고 전체를 위하여는 개인이 양보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말로나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몸에 익혀서 부단히 실천하여야 할 일이 아니겠오? 결국에 가설라무네, 修身濟家 治國平天下란 얘기가 됩니다.
그래서 기득권만이 장땡이 아니고 양보만 해서도 않된다고 말 할 수 있오. 젊은 사람들은 있는 기량을 다하여 또 다른 기득권을 확보하려고자 치고받고를 계속해야 할 것이고, 나같이 이미 은퇴한 사람에게는 젊은 사람들과 패권울 다퉈야 할 이유가 없는 고로 "양보에 精進(정진)하는 길"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거지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치라"고 했던가? 지금이 바로 그래야 할 때가 도래했구먼 그랴.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