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홍진세상을 통일적 다수의 바보행진, 흙탕물 속에서의 아웅다웅이라고 여기는 게 아님.
어쩜 그 황탄함으로부터의 돌파구는 독신 그리고 명상이란 점이 확인될 정도.
이 말을 함에 있서서 짚고 넘어 가고 싶은 '순진성'에 대해 진정코 뭔지 모르면서 나는 칸트가 테이블 토킹[탁상공론]에서 윤리의 기본가치로서의 선(善)을 진리와 혼동했음을 느낀다.
도대체 깨달음이 있다면, 이 깨달음이 있는 최고선(最高善)이 아니고서는 칸트가 갈파한 '최고선 개념'이란 선결문제인 진리와 신앙을 빼버린 단팥없는 찐빵.
그의 말은 이 세상 실재계 찐빵에서 단팥 빼고 부분에만 합리적이고 변증법적으로 제시한 반면의 윤리관이라고 추론함.
그 여기 좀 보십시다!
세상에서 진리와 종교문제를 빼고 말한다니?
눈만 뜨면 인구에 회자하는 진리와 종교이야기를 어떻게 철학에서 뺄 수가 있나?
그러므로 할 수 없이 Jeffry Moses는 "대부분의 종교는 사랑을 강조하고 그리하여 영적훈련을 통하여 인간애의 목표를 통해 신자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이끌어주는 효과가 있다"는 다라이 라마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로써 종교적 도(道)의 수평적 동일성을 확인함으로써 종교를 아주 잘 본 것이기에, 하지만 종교이념 역시 윤리 중에서 '사랑'을 진리로 오해하는 논리가 전개됩니다.
이 것 역시 잘못 생각한 겁니다.
까닭은 다수가 지지하여 세속적으로 바뀌는 윤리는 절대적이 아니기에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기 때문.
윤리가 의(義)라면 윤리가 부상당하지 말아야 할 것.
'원수를 사랑하라'니 이 윤리가 의로운 사람이 죽음을 받지 않겠습니까!
이, 그 황탄한 윤리ㆍ도덕관은 성현의 진리일 뿐이자 오직 당해년 시의에 따라 화목을 목적으로 한 생활수단이자 소수 현인의 생각을 재판(再版)한 법령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
그러므로 윤리 설정, 법집행은 다수를 위한다는 핑계, 위정자의 공권(公權) 행사.
그 (넘의) 수많은 이념(-ism), 공산윤리, 민주이념, 종교사상-교리 역시 연구과제일 뿐, 인류가 풀어나가는 숙제일 뿐 과학적인 실험으로 아직은, 영원한 결과가 도출된 게 아니잖습니까?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음흉한 생각으로 성현의 위엄을 뒤집어 쓴,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 쓴 여우같은 권도, 자신의 약체(弱體)를 모면하려는 소라게(hermit crab), 천리마 꼬리에 달라붙어 천리를 달리려는 쉬파리 행세.
그 우리의 역사를 보십시요!
제국주의자들의 패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 종교전쟁으로 점철된 역사.
오직 사회생활의 모델일 뿐, 과학적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 흙탕 공론에서 갈마듦(alteration, diversion)으로 나온 액(厄)막이 중의 하나로 한 그룹은 흙탕을 가라 앉히고 맑은 물 한 사발을 뜨는 독신생활이자 다른 그룹은 윤리관을 초월하는 안빈낙도의 명상일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