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 것이 깨달음. 그런데 이 걸 모른 분이 진(晉)나라 혜원법사.
까닭은 다음과 같지요.
이 혜원법사는 여산 동림사에 있으면서 시냇물 호계(虎溪)를 건너 결코 사람을 만나러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지요.
그러나 오래간만에 서로 대화가 통하는 도연명, 육수정(陸修靜), 이 두 사람을 배웅하며 그 내울을 건너갔습니다.
"아차 깜빡!"
안거금족(安居禁足)의 맹세를 자신도 모르게 거스렸음을 깨닫고 세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고 하여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사자성어 고사숙어가 생겼다지요.
그런데(이 '그런데'가 중요함) 그 혜원법사는 그 '거스렸음'이 '깨달음'이란 걸 못 느꼈음이 분명합니다.
그저 반가워서 자기 처신을 잊은 순간에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방에 펄럭거리는 그 찢어진 벽지에도 그 순간은 찾아 올 수 있을 겁니다.
마음으로 정한 것을 마음에서 잊어 그 다리를 건너간 순간에도 깨달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무슨 소중한 물건으로 생각하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그 시간이어야만 된다, 그 명승고찰[대사원, 로마교황청]에 머무는 시간, 공간과 형식이 있는 줄로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