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할 일도 다 있네. 그 유명하신 공자님이 괄시를 받아 끼니를 걸르셨다고 사마천이 《사기》에 올렸으니.
등장인물; 추연(말먹이는 사람 추騶, 넘칠 연衍)
추연이 양나라에 도착하였을 때에 혜왕이 교외에서 영접하여 귀빈을 대하는 예의를 베풀었답니다. 그가 조나라에 갔을 때는 평원군이 곁에서 걸었고, 자리의 먼지를 털어 주었답니다. 제나라 선왕은 그를 상대부(上大父)로 모시고 큰 저택과 노복을 하사하고 학문을 가르치게 배려했고, 그가 연나라에 갔을 때는 소왕이 길을 쓸면서 앞서서 걸었고, 제자로 삼아달라고 청하면서 갈석궁(碣石宮)을 지어 드리고 몸소 그 곳에 가시어 추연선생에게 사사하였답니다. 그러자 추연이 《주운(主運)》을 지어 드렸다지요.
그가 무릇 제후에게 그토록 끗발을 날렸는데, 그 동안에 공자님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배를 곯고, 맹자가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곤란을 당했다지요(54).
이로 보아 지식이 있서 지혜를 많이 쌓았다손 치드라도 인기가 없으셨던가 봅니다. 그 '추연'의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의 진가를 가늠하기 보다는 공자님에게 그 무언가가 빠진 면이 있섰나 봅니다. 그 제나라에 76 명의 학사(學士)가 운집해 있섰다는데 공자님은 집현전같은 그 곳 문인의 전당 직하(稷下)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나 봅니다. 후일에 맹자, 순자, 장자가 그 직하에서 공부하였고, 순자는 직하의 좨주(祭酒:직하학사의 반장)를 3번이나 역임했다지요.
그러면 공자님은 왜 찬밥덩어리셨을가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세상사에 부대끼는 재주마저 가지고 있서야 하고, 아무리 지혜가 출중해도 사람 손에 걸리면 죽는다고 공자가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여기지요(204).
기록에 의하면 공자님이 열국(列國)을 공격, 방어하는 병법에 대한 질문에 입을 떼지도 않으시니 묘책을 답변하시지 못하셔서 태공(太公)을 못하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