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71년에 제(齊)를 정벌함.
진(秦)의 소왕(昭王)이 15성(城)과 조나라에서 보관하고 있는 화씨(和氏) 옥(璧)과 교환하자는 간계를 부리자 왕을 모시고 그 소왕을 만난 면지 회담장에서 변론하여 없던 일로 마무리 되어 염파 이후의 문관으로 상경(上卿)에 제수됨.
염파(廉頗 생졸년 미상); 같은 조나라 시절의 장군.
종주국 주나라 난왕(赧王) 32년(283 B.C.)에 진(秦)을 치고, 제(齊) 나라 은성왕을 공격하여 2성을 빼앗은 공으로 무관으로 상경(上卿)에 오름.
연(燕)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5성을 할양받고, 기원전 245년에 위(魏)와 싸워 번양을 함락.
그러자 염파가 한갓 말로써 도리어 나의 위에 있기에 부끄럽다며 인상여에게 욕 보일 것을 맹서.
이에 인상여가 칭병하거나 조정에서 염파를 피하자 인상여 집의 식객들이 연이어 부끄럽게 생각하자;
인상여가 말하기를 '진나라가 강해도 나로 인해 욕보이는데, 내가 염장군을 두려워할 것인가? 진나라가 감히 군사력을 우리나라에 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두 사람때문이기에 동반자를 먼저 생각하고 개인 일은 나중이 아니겠는가?"- 선공후사(先公後私)
이 소식을 듣고 염파가 웃통을 벗고 막대기를 들고와 인상여 집 안에 엎드리며 이 것으로 때려달라고 사죄의 뜻을 표했음.- 육단부형(肉袒負刑)
그러자 이에 감복한 인상여와 화해한 염파는 서로 죽고 살기를 같이 하여 목이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친한 사귐으로 이어져 사마천 사기에 이런 경우를 졸상여환위'문경지교'(卒相與驩爲'刎頸之交')라고 기록.
그 후 염파, 조사, 전단 장군의 조나라는 염파를 아끼던 효성왕이 죽고, 새로 즉위한 도양왕(悼襄王)이 전쟁을 싫어하여 염파가 진나라에 지구전을 펼치자, 진나라 재상 범수의 이간계로 나이 70 넘은 염파에게 집에서 편히 쉬라고 해임.
이에 너무나 분했던 염파는 자신의 후임자 악승(樂乘)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위(魏)나라로 망명.
이 후로 진나라의 작고 큰 공격을 계속 받자 시달리다 못해 사자를 보내어 염파의 전투능력 건강상태를 알아보게 지시함.
이에 옛 날부터 염파와 앙숙이던 간신 곽개가 사자를 매수한 결과 건장한 염파의 소식을 사실대로 아뢰면서 한 마디 거짓말을 덧붙여 아뢰기를 '신과 같이한 자리에서 똥을 세 번 쌋는데,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하더군요'란 말 한마디를 덧붙여 병신되기 족했음.- 삼도유실(三度遺失)
인상여가 늙어 병들고, 염파가 물러난 후 조나라는 조사의 경험 없는 아들 조괄을 대장으로 기용하여 장평대전에서 진나라에 당하고 맘.
소양왕이 죽고 5년 후에 소양왕의 증손자 진시황이 등극하여 중국을 무력통일.
이 글에 인용된 원저자들에게 감사드리며, 연구한 분들, 특히 한국일보 김(정수) 편집위원님의 공로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