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물결이 우리 교회에도 닥치긴 했어도, 몇번 나오다가는 어디로 사라지는 일이 계속되었다.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기에는 우리 교회가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곳 박사들도 얼마전 까지 접시딱기로 학위를 받았지 않았던가? 내가 처음 나갔을 때의 70-80명교인 중에서 초창기 박사들의 일부가 새로 온 인사들에게 밀려나서 우루루 다른 교회로 가버렸다. 새로온 박사나 의사들은 젊은 층이었지만 박사는 박사였다. 그런데 100여명이 되던 교회가 16년 후인 1994년에 김 목사가 부임하기 까지 겨우 120 여명의 교회로 발전한 데 비하여, 그런 Trenton의 진짜 이민 교회들은 400-500명의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체 교회까지 크게 짓고 있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우선 한국에서 이민 오는 인구가 갑자기 증가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뉴욕'과 인근의 '훠틀리'같은 한인타운을 발전시키면서, 그 남쪽으로 교통이 좋은 '에디슨' (발명가 '에디슨'이 살던) 이든가 더 남쪽으로 '프린스톤'으로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얘기한 직장마련의 문제로 다시 더 남쪽으로 가서 허름한 옛날 동네인 '트렌톤'에 정착했기가 십중팔구였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장삿꺼리의 정보를 교환할 필요가 있었으며, 같은 입장의 선배들 한테 채소가게, 세탁소, 네일싸롱, 옷가개, 구두수선, 그로서리, 간이상점인 7-11등의 사업정보를 입수 할 수 있었고, 또한 그로써 동지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영적구원의 말씀은 뒤로 밀어놓고 우선 빵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그 곳의 목사들도 이들의 몸부림을 몸으로 때우며 그 정신적 요구에 맞추어 설교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새벽에서 밤늦게 까지 국밥을 제공하며 이들의 육신과 정신적 피곤을 달래주는 것이 예사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떠했는가? 그런 사람들이 잘못 알고(?) 나타났다가는 질겁을 하고 다른 교회로 달아나 버렸다. 우리 교회에서는 얘기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 무식한 박사들 때문이었다. 자기들은 전공분야에서는 박사일지 모르지만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는 찬바람을 날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교리에는 훨훨 날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줄은 몰랐다고 봐야겠다. 맨손 이민자들의 갈급한 생활고를 도와줄 수 없는 낙제생들이었다. 공동회의 하는 자리에서 내가 일어나서 항의 했다. 20년이 넘도록 자체교회를 가지지 못하고 셋방살이를 하는 이유가 뭐냐? 심지어 건축기금의 구좌조차 없지 않은가? 그래서 부랴부랴 뭔가를 시작해서, 지금 (2000년 경)에 4 베드룸 콘도가 하나 생기게 되었다.
16년 동안 한명의 목사는 심장마비로 타계했고, 뒤이어 4명의 목사가 왔다가 갔다. 오늘의 주인공인 김 목사가 오기 바로 전에 이 아무개 목사는 '천사를 오늘 아침에 봤다'고 하더니 '우리 교회는 장로가 틀려먹었다'고 소리소리 지렀다. 내가 이런 교회를 다니다 말다 하던 어느날 이런 해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를 따라 나오라! 그리고는 바로 코 앞에 새 교회를 차리더라.
그래서 1년이 넘도록 새 목사를 찾았다. 결국 김 목사를 '훠틀리'에서 멀지 않은 '러더훠드'란 곳에서 강제로(?) 청빈해다 놓았다. 그 곳에서 잘나가던 양반이 이곳 유명한 '프린스톤 신학교'가 그의 사회경력에 이롭다고 판단됐다고나 할까? 교회에 전념하지 않고 여러가지 바깥 활동을 허용하는 조건을 걸어서 6개월을 더 기가려서 그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우리 교회가 양보한 것은 이렇다.
'뉴욕'시 어디에서 목사들 끼리 설립한 Credit 없는 한인신학교 (쉽게 말해서 엉털이)의 구약교수 활동을 허락했고, 또 기독교방송의 기독상담실 대담자로 나서는 것을 허용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늘 밖으로 나돌았다. 그는 우리 교회의 목회자 임과 동시에 과외활동의 정력가였다. 그는 한국기독교재단의 유명대학을 졸업했고, 목사의 아들로서 영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으며, 미국의 '아이오와'주의 어느 대학, 그리고 '하바드' 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것으로 안다. 그리고 '보스톤'에서 개척교회를 3년 정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더훠드'란 곳에서 또 몇년을...
그는 174 cm의 키에 허리 싸이즈는 38로써 뚱뚱한 편이었다. 얼굴은 둥굴넙적했는데 체격에 비해서 머리통이 보통사람 보다 더 큰 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관록이 있어 보인다 할까, 고집스러워 보였으나 '매너'는 매우 상냥하고 붙임성이 있었다. 예의도 발랐으나 어딘가 열등의식이 있는지 거짓말로 적당히 둘러대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부각시키야 하는 그런 욕구에 밀려서 인지...자기 명성에 보탬이 되는 엉뚱한 짓을 잘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먹는 것을 좋아 했다. 기회만 있으면 장로나 또는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한테 무슨 껀을 만들어 뒤집어 씌웠다. 본인이 설교 중에 자기는 목사의 아들로서 너무 가난하게 자라다 보니까 먹는 것을 그리 좋아 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김 목사가 부임한지 얼마 않돼서, 헬리콥터에 실려서 50마일 남쪽에 위치한 '필라델피아' 병원으로 급송된 일이 일어났다. 나중에 판명난 사실은 과식으로 인사불성을 했다는 말을 담당 장로한테 들었다. 과식해서 의식을 잃는다는 말은 그때 전후로 다시 들어볼 수 없는 그런 병이었다. 교회란 이런 사람, 저런 인간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고, 부족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구원받는 곳이다. 김 목사가 12년 동안 외유(外遊)를 하다가 결국 교인들의 다수 득표로 퇴직당하고 말았다. 그 요인은 '엉털이 여전도사'와의 '내유'(內遊)라 할까... 그런 비리에 연루됐던 데에 기인했다.
또 다시 몇년이 흘러가며 다시금 50명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 현실에 와 있다. 7-8년 전의 얘기다. 새로 부임한 목사마저 시원치 않아서 요모양 저꼴로 문제가 산적해 나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바가 실로 많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푼다고 했거늘..., 오직 맺는 일만 일삼으니 어느 하 세월에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설 것인고?
禪涅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