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해
전에 뉴욕 Manhattan
의 Broadway
에 갔다가 대학동창을
만났었다. 고생하고
있는 것이 그의 얼굴에 역역하게 나타나 보였다.
가까운 Coffee
Shop 으로 가서 앉자
마자, 자기의
半人生의 좋았고 나뻤던 내력을 거침이 없이 내게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한국의 어느 유명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자기를 音搬(Record
판)을
만드는 PVC 자료과에
배치했고 좀 지나서 課長(과장)이 되었다.
유행가 音盤(음반)을
만드는 제작자들을 많이 상대하는 자리였다.
당시에는 PVC
원자재가 부족했던
시절이라서 음반제작자들은 이런 '플라스틱'
원료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 장사의 흥망을 좌우했단다.
이런
이유로 해서 製作者(제작자)들은 '풀라스틱'
課長을 잘 대접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業者(업자)들은 수많은
젊은 女歌手(여가수) 지망생들을 Hit
시켜 준다는 미끼를
던지며 그 課長과 Sex여행을
해달라고 은근히 慫慂(종용)했다.
그런 虛榮(허영)과 정조를
바꾸려는 여자들과 내 친구는 每週 週末(주말 여행)에 제주행
비행기를 탔었다고 말했다.
그 여인들 중에는
매우 비협조적이었고 언짢은 태도로 동행했었던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자기로서는 좋왔던
한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자리가 염증이 났다는 건지 아니면 신물이 났었는지,
어느
큰 건설회사로 직장을 옮겨서 Guam (태평양의
'괌')의
지점장으로 나갔단다.
그런데
자기 부인이 거기에서 뇌암이란 진단을 받았다.
병치료를
위하여 미국으로 급히 건너 왔다.
건강보험이
없었던 바라,
뫃아논
사재를 털어서 그녀의 병치례 하기를 2년을
넘겼다.
신앙생활에
무심하던 그들이 급기야 교회를 찾게 되었고,
교인들의
동정으로 엄청난 병원비의 일부를 해결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기적을 위하여 철야기도를 한 보람도
없이 결국은 두 자녀를 남기고 타계하고 말았다.
나는
전화로 가끔 어떻게 지내는가를 알아보고,
그가
혼자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하여 상의도 하고 충고도
하던 차에 그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교포로서 꽤 성공한 분이란 말을 들었다.
내가
그 친구에게 아파트에 살지 말고 집을 사라고 권했었는데
내 말대로 집을 샀고 그날의 초청은 그 집을 구경시켜
준다는 명목이었다.
그간의
나의 관심과 동정이 고마웠다는 건지 '스떼키'를
구워냈는데,
그렇게
질기고 맛이 없는 Steak와
소금에 쩔은 김치는 그때 처음 먹어보았다.
식사
후에 돌아앉아서 옛날 좋았을 때 찍은 부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인물이
좋은 梨大영문과 출신의 여자였다.
이미
끝이난 이 마당에 再婚(재혼)하는 것이 急先務(급선무)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그를 설득했다.
一理(일리)가
있었다는 건지 몇개월 안에 한국으로 들어가서 여러
여자를 선보던 끝에 한 여자를 골라서 급히 결혼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가 선봤던 얘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9 명을
두어 週(주) 사이에 '미아이"
했었단다.
어떤
여자는 은행 지점장이었고,
어떤
여자는 영화배우 같은 인물을 하고 있었고,
어떤
여자는 대학의 조교라든가,
등등의
노처녀 아니면 이혼녀들 이었다고 신나게 내게 떠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 얘기하려는 여자로 그가 낙착짓고 결혼하게
되었는가는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만나보니 가름한 얼굴에 지성미도 있어 보였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가정부인으로서는
괜찮아 보였다.
그때
마침 내가 한국에 다녀올 일이 생기자 영주권자의
부인으로 입국하는 수속서류를 그녀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서초동
어느 음식점에서 미국엘 간다고 흥분해 있는 그녀에게
서류를 전달했었다.
미국
영사관에 가서 인터뷰하는 일과 미국 생활에 대하여
이것 저것 얘기를 나누다 헤졌다.
그런데
내가 귀국한지 몇달이 않되는 그 해 12월
24일
아침에 그가 교통사고로 죽어있는 것이 길에서 발견되었다는
통고가 왔다.
그의
집으로 달려 갔었다.
대학
동창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고등
학생 딸 하나와 중학생 아들이 졸지에 두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되어 울고 있었다.
우리들은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마침
일본에 사시는 그의 아버지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납덩이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집을
나섰었다.
이러한
不幸은 왜 일어나는가를 묻고 또 물었다.
그의
죽은 얼마 후에 내가 다시 한국엘 갈 일이 생겼다.
손꼽아
출국할 날만 기다리던 그 새부인을 불러내어 그의
訃告(부고)를 전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류상의 남편의 재산 정도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친구라
하지만 내가 어찌 고인의 재산 상태를 알 수 있었겠는가?
단지
그가 뉴저지에 새로 샀다는 집과 남아 있는 자녀들을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했다.
그녀가
혼잣 말로,
"실은
우리는 부부라고 할 수 없다.
신혼의
잠자리에서 별일이 없었으니까...그것을
관계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알송달송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
후에 그녀가 정말 미국으로 건너갔었는지,
내
친구의 집과 자녀들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내
친구가 그 집을 그냥 가지고 지금 까지 살아왔다면,
아마도
거의 "밀리온"의
가치를 홋가할 것이다.
나중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그 근방에 정착했으니,
하는
추측이다.
그
다음 해에 한국엘 간 김에 내 친구와의 불행한 미완성의
결혼이 어떻게 진전됐을까 궁금하여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남자의
음성 뒤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더 이상 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어 전화기를 놓고
말았다.
사람들의
運命(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
자체가 幻覺 (환각: Illusion
혹은 Delusion)이라더니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이들의
潛在意識으로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헤매던 그 자리에
무었이 남았던가?
우리를
이런 데로 몰고 가는 그 無意識이란 현시대의 '쏘후트
웨어'는
정말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푸로그램'인가?
만일
아니라면......,
어떻게
바꿔끼어 넣을 수가 있나?
도대체 왜 이러한 一連(일련)의 寸劇(촌극)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가? 우리는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실의 순간 순간을 이미 설정된 software에 따라서 zombie처럼 판단해서 움직이고 만다.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생각하고 다른 길을 택할 필요와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쉽게 말해서 동물적인 감각 내지 그동안 축적돼온 습관을 그대로 견지하며 하루를 산다.
내가 내 친구의 반평생을 들먹인 이유는, 사회에 첫걸음을 나섰을때 여자들의 허영을 쎅스로 맞바꾸면서 좋은 가정의 배우자를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이 그녀의 뇌종양을 초래했고, 그녀가 죽고나자 두 자녀와 함께 낮설은 異國(이국)에서 허둥대다가, 졸지에 교통사고로 일찌기 저 세상을 갔고, 재혼한 여자조차 같은 길을 걷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因果應報(인과응보)의 엄연한 再版(재판)이라는 현실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무었이 이런 불행한 일들을 계속 진행시키게 하는가? 潛在意識... 바로 그거 올시다.
禪涅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