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천을 거듭하다가 21세기에 들어선 한국땅에서는 두쌍 중에서 한쌍, 다시 말해서 결혼하고 약 50%가 이혼하는 세계적 기록이 한국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이혼한 여자들을 離婚女(이혼녀)라고 부르지만 얼마 전까지 일괄해서 寡婦(과부)로 몰아붙였었다.
물론 당시에는 離婚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남자쪽에서 쫒아내는 것으로 소박을 당하는 여자들의 신세였었다. 남편이 죽어도 과부요, 소박을 맞아도 과부였으나 요즘은 자발적이든 他意的(타의적)이든 '자유부인'으로 탈바꿈을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자유과부'의 선배를 뒤지다가 보니, 舊約(구약)의 '룻記(Ruth)'가 대략 기원 전 1100여년경의 얘기였으니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과부의 기록이 아닌가 한다.
얘기인 즉슨, '나오미'라는 여자가 '베들레헴'에서 남편인 '엘리메렉' (Elimelech)과 살았는데, 흉년이 들자 死海(사해)동쪽의 땅인 '모압'지방으로 갔다. 거기서 남편을 잃고 아둘 둘 마저 죽자, 두 며누리들에게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서 再嫁(재가)하고 살거라고 일렀다고. 그 중의 한 며누리인 '오프라'(Orpah)는 제 갈길을 갔으나, 또 다른 며누리인 '룻'(Ruth)는 시어머니를 따라 '베드레헴'으로 돌아왔다고 한다.(Ruth 1:18)
며누리인 '룻'이 부자인 '보아즈'(Boaz)의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 척하면서 그를 꼬실 것을 청하자, 시어머니'나오미'가 허락하고 여차여차 해서 두 사람이 재미보다가 아들을 낳았으니... 그의 이름이 '오벧'(Obed)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王(왕) '데이비드'(David)의 할아버지가 되었던 바였다.(Ruth 4:17)
한편, '이스람'의 창시자인 '모하멭'(<Muhammad or Mohammad, Mohammed, Arabic: محمد) (c. 26 April 570 – 8 June 632)[1] was the founder of the religion of Islam>이 기원후 632년 이래로 당시의 세계를 제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戰死者(전사자)를 배출하였고, 동시에 과부와 고아들을 대량 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누구든지 재력이 있는 자는 4 명까지 부인을 둘 수가 있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단지 모든 것을, 심지어 잠자리를 포함해서, 동등하게 대우하여야 한다는 단서를 단단히 붙어놓았다고 한다.
과부들의 八字(팔자)에 이런 파격적인 조처가 있었던 시기가 한반도에서로 말하자면 신라(新羅:기원전 57년 ~ 후935년)가 羅-唐(나-당)연합군으로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시기였었다. 그 당시에 생긴 과부들을 어떻게 우리 민족이 처리했다는 기록을 내가 알지 못하나, 조선시대(1392 -1897년)에 들어와서는 과부를 오밤 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홋이불을 씌워서 업어가는 방법으로 改嫁(개가)시킨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방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럴 행운(?)조차 없었던 대부분이 장마당의 작부로 연명하던가, 남의 눈을 피하는 첩으로 살았던게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과부라 하면 남정네들이 모두들 입맛을 쩝쩝 다시는 습성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불쌍한 인간들을 이렇게 대우했어야만 했는가? 그들도 우리들의 어머니, 누이, 여동생, 사촌, 팔촌이 아니었던가? 이들이 어찌어찌해서 불행한 처지에 빠지게 됐었거늘, 과부를 재혼하지 못하게 했던 법이 조선땅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甲午更張(1차에 갑오경장, 혹은 2차에 갑오개혁)이란 것이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대대적인 사회제도의 혁신으로 여러가지 법령이 내려젔었다. 정치, 경제 및 군사문제에 대하여는 여기서 거론할 필요가 없고, 사회적으로 인재등용에서 부터 문벌과 신분타파(소위 양반-쌍놈), 문무관리 차별폐지, 연좌제 형벌폐지, 조혼 금지, 청상과부 재가허용, 公私奴卑(공사노비:노예제도)혁파, 의제 간소화 등등을 제도적으로 개혁하였다.
내게 특별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靑霜寡婦(청상과부)의 再嫁(개가)를 법적으로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불과 117년 전인, 서기 1895년에 말이다. 그 이전에는 과부가 다시 시집을 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우리들의 잘난 양반들, 조선사람들이 이런 무자비한 짓을 했었다. 이게 야만인들의 작단이 아니면 무었이었던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구나.
고려시대는 어땠고? 동남아나 중국을 다녀보면 한국여인들 만큼 잘 생긴 여자들이 드물더라고 하더군. 원래 南男北女(남남북녀)라고, 북쪽의 여인들의 인물을 알아주었던 바라, 원나라(1,200년代)부터 1년에 500여명의 한국처녀를 매년 공출해 왔었다. 개중에는 잘 풀려서 왕비가 된 여인도 서너 명이 배출됐건만 대부분이 고관대작들의 노리갯감으로 전전하다가 일부는 창녀로... 또 일부는 다기 고향으로 환국하는 행운이 있었다.
이들을 이름하여 還鄕女, 소위 '화냥년'이라고 불러서 자기 고향에는 얼씬도 못하게 한 고로, 술파는 酌婦(작부)로써 그들의 恨(한) 많은 인생을 그렇게 마감했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조선땅에서는 주막에서 술을 사면 당연히 이런 종류의 버려진 여인들이 따라 왔었던 관례가 전해져 내려왔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관습이 청계천 내지 종로3가의 주변에서, 아니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고 공공연히 지켜져 왔던 것이다.
한편 중국땅에서도 여자들의 입지에 큰 변화가 있었으니, 1950년代에 득세한 모택동이가 한가지 잘 한것이 있었다면, 고질적인 男女不平等(남녀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했던 성과를 손꼽을 수 있다. 그의 萬里長征(만리장정)의 역전고투에서 女子레릴라들도 같이 분투했던 결과였던 것이다. 실상 중국은 여자들의 위치가 한국에서 처럼 劣惡(열악)하지가 않았던 과거를 고려해야만 하지만... 내가 최근에 보는 바는, 중국전통은 女尊男卑(여존남비)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래놨으니 毛주석도 일하기가 쉬웠겠지요? 禪涅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