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진리관을 제대로 보자는 말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헷갈려 보이는게 진리? 아니다! 진리는 명확한 땡땡가라(clanging color).zz
여기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윤리는 진리와 영판 다르다는 점. 예를 들어 선생이 친절하게 1+2=3이란 걸 가르칠 때 '친절'은 윤리지만 '1+2=3'은 진리다('칸트'적 분석명제로서의 대중적 진리).
기록된 바 예수님이 "침대 밑에 등잔[등경]을 두면 불빛이 자연히 새어나오지 않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말하면 언행에 묘함이 있서, 다른이에게 베풀고 잊으려 해도 어렵다는 뜻.
"그 사람에게 베풀고 나서 잊어라♥" 즉, 베푼 것에 고마워하는 분과 베푼 나를 잊으란 말은 착함으로 인하여 그 어느 경지에 쉽게 도달한다는 윤리이지 기쁨과 혼동하면 안될 것.
항차 여럿을 도움은 사회사업의 아름다운 경지란 말이요, 대가를 바라지 않아도 자신의 기쁜 빛이 새어나옴을 말하거니와 남이 꺼내 와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 건 효과를 바라는 공지사항이 아니요, 공감차원이라 하겠다.
이는 마치 표범이 원숭이를 잡아 먹고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뜻. 그러면 우리 인생 역시 자연, 하지만 미묘한 만물의 영장. 항차 권선징악의 윤리에서랴. 그 어찌 표식이 안 나리오.─죄송♣ 언제나 유식한 척, 그러나 인용구;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아잡사, 마태 25:31~46, 사도 2:46
이 윤리는 만물을 다스리는 인간의 특권, 책임이 따르는 자유의지. 그 소중한 인륜을 어기면 패역. 싫거나 좋거나, 하지만 진리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음.
만약에 그 돈밖에 모르는 그 어느 누구 목사가 있다면 그의 행위는 윤리적인 문제. 목사자격 커녕 인간이기에 부족함이 많다. 그가 신자들로부터 받아낸 각 20만원, 80만원 두 뭉치 헌금을 합쳐보니 합계가 100만원이었으면 산수한 답만 진리요, 100만원 밖에 안 걷혔다는 그분의 생각은 패덕. 이 사람은 인지상정 보통 사람되기에도 갈 길이 구만리. 마치 원숭이를 잡아 먹는 표범의 가죽무늬를 바꿀 수 없다는 뜻. 세례, 영세, 부흥회로도 역시 역부족. 이러고도 그 돈으로 남부럽지 않게 산다면 그가 무슨 양을 치는 목자냐, 표범이지.
물론 안다, 들었다. 몇몇 성직자들이 경제와 정치를 너무 밝힌단다. 그러나 그 사람의 것은 그의 것이다. 미안하게도 우리 아랫것들은 위정자 만나기 어렵다. 전공은 달라도 모든 끝은 서로 만나는 묘함이기에 급수가 수평적으로 엇비슷하기에 서로 대화가 통하는 까닭이리라. 그러나 대신 그 교차로에서 쥐새끼가 호랑이와 담판한다면 좀 뭣하게 귀에 들림을 어쩔 수 없다. 하면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등치 큰 경제인, 정치가를 만난 목회자는 복이 있음음 까닭은 만난 상대에게 전도하기에. 우리같은 쫄따귀는 백날 전교해봐야, 쫄따귀에게 전교하는 배짱일 뿐.
여기에서 이, 나 쫄따기가 1994년도에 발간한 '역설적 진리(Paradoxical Truth♣)'에서 성직자는 윤리를 기초로 해야함을 강조했지, 진리가 윤리적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낸시 피어시'는 '완전한 진리(Total Truth)'에서 "당신이 성직자를 만나려고 기대했던 곳에서 정치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란 말을 했다. 이 건 윤리적인 문제이지 이 것으로 진리를 나무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불전을 세는 총무원을 떠나 불교의 진면목을 보자. 불교에서의 해탈은 윤리를 도구로 한 '나'의 발견이요 인식이지 진리에 관심없다. 고로 "진리를 얻은 바가 없다"고 금강경은 말한다. 그렇다고 나 자신에게 미안해 하지 않는다.
이 것이 '톨레 에르하르트'의 자성론(自省論)이 나오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해설집과, 눈 앞에 집중하면 이 것 역시 좋은 방법'이란 종교에 대한 일반론이 나온게다. 그러나 이 것은 시대적 병폐인 종교의 패륜을 비난한 윤리적 발상이며 진리를 도외시한게다. 윤리는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권장사항이지만 진리는 강요한다, 요지부동이다. 진리는 윤리에 숨어 있지 않고 동반자도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란 단어를 여러 번 쓰셨다. 이 것이 내가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이다.
우선 이시형님의 말♣을 옮긴다는게 내 말만하다 늦었네. 『 세상은 내 마음 끌리는대로 있고, 가짜꽃도 알 때까지는 진짜다. 세상은 있다고 다 보이는게 아니다. 소리를 다 들으면 귀가 따거워 잠을 못 잘 것이고, 있는게 다 보이면 우리 머리통 대뇌중추는 터질 것이고, 없는 걸 있는 것처럼 가지면 집구석이 쓰레장이 될 것이다.
선택기준은 그때 그때의 내 마음의 조율(tune)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 이 세상 모든 것 다 받아지게 된다면 나같은 골통나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고로 세상은 공평하다.─조왕/조행기. 이시형님의 글 중에서...』
그렇다. 삶은 내 필요한 만큼 내 것이고 내가 필요없는 것을 네가 알 수 있고, 내가 아는 것만큼 떠든다.
기록된 바, 내 몫으로 일체 내 마음 먹기에 달렸고, 내 마음 먹은대로 인연이 맺어져 칭찬이나 화를 당할 것이다. 그러기에 차라리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나오는게다.
◑이 세상은 정답이 없는 인생◐ㅎㅎ
요석공주가 원효에게 말했다. "네 여자가 되게하여 내 이름을 갈아라!", "환비봉!"
대각간이 외쳤다. "요석공주를 출척하고, 원효대사의 승직을 박탈하라!" "옳다!"
윤리로 따지자면 스님 원효가 요석공주와 정염을 불태워 경주김씨 처녀에게서 경주 설씨로 성이 바뀐 설총을 낳음은 스님으로서는 파계의 산물이요, 성골인 요석공주로서는 음종의 반란(brutum fulmen)이다. "맞다!"
그러나 윤리는 인간답게 살려는 윤리요, 보다 완벽해지려는 수단일 뿐, 진리와는 전혀 다르다. 윤리는 도구다. 따라서 완덕(完德)으로 나아가려고 마음을 정하는 선정(禪定), 율법교리를 지식으로 삼는 지계(持戒), 욕설을 피하고 스스로 낮추어도 보는 마음(忍辱卑下心), 사랑(자비보시)에 파격적인 경험이란 수단이요, 역시 변화요, 동화요,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의 묘라 할 것이다.
해탈은 인식이지 실체가 없다. 이로 보아 원효대사와 요석을 잡아 족칠 도(道)는 없다. 고로 위의 두 사람을 처벌할 묘법은 없다.....졸저 스테인드 그라스♣ p 397
이 열린마당에서 정답을 찾는 것은 잡목 뿌리를 헷갈려 치며 고기를 낚으려는 짓이요, 강태공이 곧은 낚시로 세월을 낚는 것과 같다.
다음은 【프랑스 어느 고교졸업시험문제의 정답은】'정답이 없다'였다.
1.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2.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3. 종교적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성을 포기하는 것인가? 4.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면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대신 위안을 주는 환상을 쫒아도 좋은가? 5.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6.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의미를 빼앗아 가는 것인가? 7.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8.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9. 평화와 불의는 함께 갈 수 있는가? 10. 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가? ....
나는 이의가 있다. 각도차이;
문제 1, 5, 9, 10에 대하여 dkp의 의견;그렇다. 문제 7에 대하여dkp의 의견;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 2, 4, 6, 8에 대하여 dkp:모른다.
문제 3에 대하여 dkp의 의견;
니체가 ♨자라투스트라¹는 죽었다●고 말했다. 이 질문 3은 신이 있다는 전제하에 던져진 질문이기에 신을 믿는 종교자체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칼 마르크스의 의견을 들어 보자. 『 종교적인 고뇌는 진짜 고뇌의 표현이자 진짜 고뇌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종교는 억압받는 창조물의 한숨, 무정한 【세상의 정(情)】♥이다. 종교가 생기없는 상황에서 생기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註 공자의 여여如如),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사람들에게 환상 속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이다.
현실에 대한 환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환상이 필요한 현실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교비판은 아직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고뇌의 계곡에 대한 비판이며, 그 후광이 바로 종교다. 비판은 사슬 속에서 진짜가 아닌 상상 속의 꽃들을 솎아낸다. 인간의 환상도 위안도 얻지 못하고 사슬에 묶이게 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떨쳐 버리고 진짜 꽃을 따게 하려고.』
마르크스는 종교를 일반적으로 폄하한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는 <<헤겔의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1884>> 서문에서 현실의 모순을 고쳐나가기 위해서는 현실을 신의 뜻으로 받아주는 종교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 현실에서 잠시 비켜 설 수는 있지만 부조리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종교를 아편에 비유한 것.』
이에 대한 dkp가 반박하는 골짜는 그가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낱말뜻을 세상에 주는 정(情)】이라고 표현한 낭만적 표현이다. 그의 큰 잘못이다. 진리는 윤리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정의내린 정(情♥)이란 '자비의 손'. 자(慈)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요 비(悲)는 '고생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종교인의 기본 윤리항목인 '깨달은 자의 손(手)'이지, 진리가 아니다.
즉 마르크스는 종교의 의의를 윤리적 가치에서 정의내린 편협성이 있다는게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종교, 마약, 섹스, 예를 들면 축구, 골프, ..모두가 마약이라는 주장.
그러기에 세상은 중점적으로 윤리적인 면에서 종교의 속물성 근성을 비낭하는 것이요, 예수님 역시 '너희들이 세상도 잘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나라 진리를 알 수 있겠느냐"시며 이 윤리적인 문제에 말려들어 3년간을 허비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며 아직 안 끝났는데 저를 어이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란 영탄을 하셨던 것. 그래서 이 dkp는 그 못다 말씀하신 진리, 참다운 이치를 찾고 있는 것.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상상 속애 젖어든 것이든, 진짜이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여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능력이 점점 더 커지고, 계속해서 더 완벽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오른손에는 모든 진리를, 왼손에는 비록 끊임없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부지런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감춰 쥐고서 내게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왼손을 택할 것이다.─-고트홀드 레싱(Gothhold Lessing) 안티괴제(Anti-Goeze). 1778
랍비 힐렐이 세운 유대사상의 목표는 「완덕(完德(으로 나아가는 것(tikkun olam, literally perfectong)」. 진리는 완덕에 있지 아니하고 리(理)에 있다.
그러므로 성인,부처, 보살, 도인 등등, 역시 진리를 찾는 길목에 서 있는 이정표 장승일 뿐, 그래도 그들이 어디냐, 얼마나 훌륭하냐?
그래서 종교를 싫어하여 '생각을 버리고 눈 앞에 집중하면 좋은 방법이요, 현존을 생각하는 것이 네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
이야말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느냐니까 '발을 만져본 생각이 나서 코끼리가 절구같다'고 말하는 마르크스는 '자기가 아는 것 만큼 말하는 것'. 이를 두고 '진리[보신불]'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경지라 한다.-금강경.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졸저 역설적 진리 p. 6, 74, 93 그래서 내가 진리를 찾는 것이다.
대저 진리를 깨달음이란 이성을 버리고 꺼벅 죽어야 되는게 아니다. 세상의 열정과 욕망을 버리고 죽어 피안으로 건너가야 금강주옥장 진리를 찾는게 아니다.
윤리는 진리를 찾으려는 '나', 나를 깨끗히 하는 준비요, 그 도에 이를 때 길가에 떨군 냄새요, 태도요, 나에게서 떨어진 부산물일진져.
그러므로 패역막심한 목회자는 윤리의 문턱에 오지도 못한 마귀요, 들개³들이다.
나는 깨달음이 아닌 소박한 그 진리를 찾으려 함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
나는 책에서 윤리가 진리로 혼동함을 보아 왔다. 그러나 성인이 말하는 '성인적 진리(聖人的眞理. esoteric truth)는 윤리일 뿐, 1+2=3처럼 '대중적 진리(大衆的眞理. exoretic truth)'가 아닌 '사랑'이라는 엉뚱한 윤리적 명제였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내가 길이요, 진리요, .."라 말씀하신 예수님에게 3년간 윤리를 다루다 진리에 대해 말씀을 못 맺으신 대중적 진리를 기대하는 것이다.
"내 하느님이여 내 하느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왕도의 횃불을 나무 말목²에 못밖았다. 그 나무는 다섯번 울먹였고, 시편 22편을 읊으시는 말목이 신약에 일흔 네 번 있기에 나는 이를 찾는 바다.vedok
²나무(xylon, tree), 말목(stauros, stake)은 로마사람이 이방인, 점령지 죄수를 나무에 매달아 못을 밖고 밧둘로 묶는 형벌. 로마 크랏수스가 시실리 스팔타쿠스 노예반란을 평정(71~70BC)하고 처형한 방법. 졸저 역설적 진리 p.21, 25, 졸저 멸절의 문명 p. 126
³들개. 늑대, 히이에나.,알렉산더 최. 나는 못난 한 편의 글을 올리기 위해 박으며, 공그리고 뒤로 가 감치고 뜯어질가 염려하여 누비기를 서너 시간 아니면 1주일 후에도 찾아 보고 소품 한복을 짓는 바늘이다. 그런데 열린마당 알렉산더 최는 성미급한 가위와 같다. 그냥 관습을 서걱서걱 자르려 한다. 조광조도 아니요 왕안석도 아니면서 그런 체 하며 속이 타 쌍욕, 반말 직직 지꺼리며 우리를 훈계한다. 이 것이 전형적인 더펄더펄 꼬쟁이 입은 놈 불한당 짓꺼리다. 인생과 비평은 짧고 요설이 난무하나 예술은 길고 치밀하다.
나는 애국가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란 가사를 외우나 도대체 한국인의 기상이 뭔질 모른다. 남산 위의 소나무 껍질에 철갑을 두른 듯 고고하다 잘 난체 하며 외국문물, 특히 사막의 야소라 하여 쇄국정책을 쓰는 게 한국인의 기상이란 말인가?
그래 이조 5백년에 그 모양 그 꼴로 정치, 외교, 문물, 사상에서 뒤져 바로 옆 나라 일본에게 망하고 말았단 말이란 뜻 아녀? 장인정신, 기껏해야 겨우 6년된 한국인삼. 심포니 오케스트러 몇 놈이나 작곡했서?
도대체 집요한 400년 전통의 등록상표 없고 수십년 형설지공의 노벨상 없다. 겨우 44년 민주투쟁했던 전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받으셨다. 또 겨우 이제야 한류 먹꺼리 잘 만드는 달인, 기계보다 솜씨있게 다루는 달인이 나오기 시작함을 본다.
그래서 나는 저런 무지막지한 알렉스 백색테러가 한시 바삐 없서지길 원하고, 자칭 짧은 시간에 서걱서걱 이렇게 휘갈겨 잘 쓴다는 욕쟁이 글에 호기심과 대리만족을 느끼는 한국인의 기상이 어서 빨리 지양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우재(牛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