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아시는 바, 거의 '획일적인 서구의 기독교주의' 이전의 명상주의와 아시아 명상, 참선은 비슷한 면이 있지요.
그렇다 하시면 로마 5현제 중의 한 사람인 말쿠스(마커스) 오렐리우스 (안토니우스)의 명상록 마지막 구절을 보면
"모든 사람은 같은 의견이 아니지만 그 것도 좋은 까닭은 그가 다른 사람의 다른 의견 역시 받아주기 때문"이란 발문이 붙은 걸 확인합니다.
따라서 기도, 참선을 포함한 명상의 목적은 서로 화목하자는 데 있으며, 그 목표는 나부터 남과 다투지 말고 조율하자는 목표, 즉 인간 완성(이 '완성'이란 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그냥 둥글넓적하게 같이 살자는 뜻이겠지요.
그러므로 좋은 의미라야 명상의 윤리적 가치가 나타나지 남의 말이라면 무조껀 구박준다면 그 것은 참선도 아니요, 기도의 목적도 아닌 오직 자기가 승리하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불안한 욕구의 얼버부림이 되겠습니다.
제대로 명상한 분이라면 공자 '석사가의' 말씀을 Arthur Waley 해석대로 저녁에 잃는 것이 없겠으며, 말한 즉슨 남의 귀에 거슬리지 않고, 남의 말을 들어도 역시 내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경지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최의 안티 글이 그렇지 못한 까닭은 세 번도 말고, 네 번 생각도 말고 공자 말씀대로 두 번 정도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글이란 뱃속으로 술술 넘어가는 술도 아니요, 한 마디의 말을 하기까지는 지금의 내 마음이 내가 경험한 전례를 참고하고 나서야 뇌수에서 언어중추로 이송되기 때문에 빨리 말을 잘 한다하여도 능사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역시 빨리 쓴다는 습관을 자랑삼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 명상적이든 아니든 간에 뉘우치지 않는다는 자인.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는 신념.
즉 날렵한 문장작법은 가상하지만 뭐가 급한지 서두르는 느낌이 보인다는 것. 즉, 명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인 것 같이 느낍니다.
그러니 아침에 도를 우리에게 말해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지요.-조문도, 석사가의
혹시,
H. E. Gould et al MODERN SCHOOL CLASSICS Cicero DE AMITICA. Socrates and Coins ill. p. 1, The Acropolis of Athens p. 62, Recapitulation p. 68 MACMILLAN & Co. 1952
Marcus Aurelius. MEDITATIONS p. 153 BOOK〃OF〃THE〃MONTH CLUB 1996
Anton Pegis. THE WISDOM OF CATHOLICISM p. 988 The Modern Library NY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