扁足'편족'이란 단어 없다. 전족(纏足).
시작은 오호16국 송나라 때 가무와 시를 좋아하는 제후국 남당(南唐. AD 937-975) 시인이자 제 3대 후주(後主) 이 욱(李煜)이 궁녀 예낭(藝娘)의 발을 비단으로 잠매고 연꽃을 새긴 금반(金盤. 큰 접시) 위에서 가악에 맞춰 춤을 추게한 중국 3촌금련(三寸金蓮) 발레. 여기서 3촌이란 10센티미터로 오그려진 기형된 발이란 뜻.
엄지발가락 이외의 다른 4발가락을 베로 감아 발바닥으로 완전히 180도 꺽어, 발톱있는 발가락 윗쪽을 땅에 대고 걷겠끔, 그 기절ㆍ중절ㆍ말절이 발톱이 벌바닥과 함께 땅에 닫게끔 병신만든 발가락으로써 현대무용 발레리나와 아이스 피겨 선수들의 발가락보다 100배 고약한 기형족.
비연(飛燕)과 양귀비 역시 전족아(纏足兒)라고 전해짐. 발굼치를 들어 제겨 디디냐, 발꿈치로 딛고 디디냐.-기종기행('足+支'踵'足+支'行)
이에 대해 기녀의 전족을 보고 송나라 소동파(AD 1037-1101)가 시(詩) 보살만(普薩蠻)으로 한탄하는 내용을 읊음.
그 후 송 태조광윤(太祖光胤) 때부터 원나라 마지막 왕 순제타구첩목이(順帝妥懼貼睦爾)까지의 습속에 대해 도종(陶宗. 호 南村, 자 九成)이 명나라 초기에 간행한 철경록(輟耕錄 30권. AD 1362) 제 24 황파조목(黃婆條目)에 수록한다.
이 악습을 '금지하자는 권고문'(勸禁發布令)이 중국임시대통령 손일선(1912. 3. 13)에 발표 전부터 청조 말기 태평천국 때에 전족(foot binding)이 낙후적이라며 방족(放足)을 주장하는 신진세력이 등장.-신해(辛亥)혁명으로 선출된 손일선(孫逸仙. 손문孫文)
한편 중국 천년사 오점을 찍은 고약한 예술인인 그는 시인으로써는 참 시인. 원랑귀(院朗歸) 등 많은 그의 시형(詩型)은 '사'(詞).
그 후 가난하고 무식한 엄마가 딸을 팔아 먹기 위해 3살 때부터 시작하여 얼추 7살 때까지 전족을 끝낸 후에 뾰죽한 신을 신겨 팔아먹었고, 아들을 고자로 만들어 내시로 입시케한 불행한 민속.
그 전족을 끝내는 동안 열의 하나는 발병으로 죽어갔다고 한다. 추측건데 엄지발부리통증, 4지외반증, 관골, 족저근막염, 소건막류, 1ㆍ2ㆍ3 설상골에 고생했을거다.
그 당시 우리나라, 비잔틴, 이스람 문화권의 볼이 넓은 신이 소개되어있는 줄로 전해지지만 이를 무시하고 그 전족의 첫째 목적은 딸을 팔아 돈벌자는 것.
둘째는 그 기형화된 발로 인해 보행이 힘들자 대신 허리, 넓적다리가 발달하고 강철?같은 성적동물이 된다고 함.
까닭은 절뚝거림, 머뭇거림, 간들거림, 비틀거림, 곱송거림, 그리고 엎어짐. 갈까 말까 머믓, 망설이다가 되돌아 옴. 이 모두 정상인의 하반신 움직임이 아님. 따라서 멀리 도망가지 못함. 도망하다 발을 헛디디어 넘어져 겁에 질린 체 끌려옴(차타포포蹉타怖捕).
이러한 것을 심미적으로 본 것 같다. 그 당시에 미녀 조건은 골격 역시 잘생겨야 하지만, 성문화는 비(肥:윤기흐르는 비계가 좀 있어 통통), 연(軟:살집이 부드럽고), 수(秀:모양새날 것).
중국 작금의 반성:
성장기의 소녀에게 편리화(便利靴)를 신기지 않는 이런 악습때문에 무도(舞蹈), 격겸(擊劒)에서 중국이 한국, 일본에 뒤지고 있지 않느냐는 반성문도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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