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널려 있는 것들이 정보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길을 가다 발길에 채이는 것들이 모두 정보다. 그러나 그 정보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활용할 수 있다. 정보는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걸려든다. 아무리 좋은 정보도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 챙겨야만 정보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정보의 가치를 안다. 마음으로 그 정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 정보가 스치고 지나가더라도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즉 평소에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 두고 있어야만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걸려드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장 방일영이 입고 있던 남방 셔츠를 보고 선경직물이 ‘앙고라’를 개발해 낸 것도, 최종건과 조용광이 평소 ‘직물’이라는 테마에 대한 안테나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콤비네이션을 이루어 개발해 낸 히트상품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깔깔이’였다.
1965년 6월로 접어들면서 직물업계에도 비수기가 시작되었다. 최종건은 여름철 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 옷감을 찾고 있었다.
“여름에 잘 나가는 옷감 좀 만들 수 없을까?” 최종건은 조용광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글쎄요. 시원한 옷감이라야 하는데 나일론이나 실크는 몸에 착착 달라붙는 것이라서 여름에는 싫어들 하거든요.”
그러니까 삼베나 모시 같은 옷감을 개발해 보라구!” 최종건은 답답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 쳤다.
“아세테이트에 아교풀을 먹여보았는데, 처음에 입을 때는 괜찮지만 한 번 빨면 풀이 죽어서 말짱 헛일이더라구요.”
사실 조용광도 시원한 여름 옷감을 개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술을 시도해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보라 이거야. 짜낸 다음 열처리를 달리 해 본다거나.”
최종건은 다시 탁자를 두드렸다.
“
열처리도 다양하게 해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런, 이런!” 최종건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일어섰다. 마침 저녁 때가 다 되었고, 거래 은행 지점장과 술 약속을 해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 날 저녁 단골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는데, 마침 최종건 옆에 앉아 술시중을 드는 술집 여자의 옷이 아주 시원해 보였다. 색상이 선명하면서도 저고리 속으로 속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그런 옷이었다. 통풍이 잘 되어 여름철 모시 대용으로도 아주 적격이었다.
“거 시원해 보여서 좋구만? 너 이거 어디서 샀니?” 최종건이 물었다.
“
이거 국산 아니에요, 사장님!”
“밀수품이로군? 값은 얼마나 주고 샀니?”
“요새 국산으로 최고 좋다는 게 갑사잖아요? 갑사 치마 저고리 여섯 벌 값이에요.”
술집 여자는 자랑삼아 말하며 자신의 치마를 펼쳐보였다. 최종건이 만져보니 촉감이 명주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약깐 까실까실하였다.
최종건은 그 자리에서 술집 여자로부터 그 옷을 산 값의 열 배를 주고 치마 저고리를 샀다. 그리고 다음 날 조용광을 만나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이 옷감 한번 분석해 봐! 무슨 실로 짰는지 모르지만 아주 여름 옷감으로는 그만이야. 우리도 빨리 이 옷감을 개발하자구!”
최종건으로부터 옷을 건네받은 조용광은 곧바로 제품 분석을 해 본 결과, 그것이 폴리에스테르 가연사(假撚絲)로 제직된 조제트(Georgette)라는 직물임을 알게 되었다.
‘가연사’란 잠정적으로(假) 꼬아서(撚) 만든 실을 말하는데, 완전히 비틀어 꼬아놓은 실과는 달리 풀어져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복원성(復原性)이 있었다. 그래서 이 실로 제직된 직물은 까실까실한 느낌을 주며, 은은하게 속이 비치기까지 하여 바람도 잘 통하고 시원하기 때문에 여름 옷감으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그러나 가연사를 만들어 내는 기술을 개발하기까지 선경직물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하였다.
조제트에 사용되는 가연사는 미터당 3천 회선 가량 꼬인 실인데, 이것을 가지고 직물을 짜내기 위해서는 실의 가연(假撚) 상태를 그대로 정지시켜 놓아야만 한다. 그런데 연지(撚止) 방법이 문제였다. 실이 꼬이지 않을 정도의 가연상태로 옷감을 짜게 되면 조제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까실까실한 촉감이 없었고, 또 까실까실한 촉감을 내기 위하여 가연상태를 높이면 실이 도로 풀리려는 복원성 때문에 꼬이고 엉켜서 도무지 짤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최종건은 부사장 최종현으로 하여금 이토추의 간바야시를 만나보게 하였다. 크레폰을 개발할 때처럼 일본인 기술자들의 도움을 얻어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바야시는 도와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크레폰을 개발할 때 선경직물을 도와주었다가 오히려 이토추가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토추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크레폰을 호주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선경직물의 크레폰이 들어오는 바람에 호주 시장에서 큰 타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할 수 없는 일이군!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일본에 가서 기술을 습득해 오는 수밖에.”
최종건은 조용광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장섬유(長纖維)의 본고장인 후쿠이(福井)와 가나자와(金澤) 지방의 직물공장을 견학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현지의 조제트 공장을 두루 둘러본 두 사람은, 마침내 가연사를 고압스팀에 쪄내면 연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일본 기술자들이 가르쳐 주지 않는 관계로 어깨 너머로 본 것 뿐이어서, 단순히 연지 방법만 알아냈지 스팀의 압력과 온도나 가열 시간과 가연 횟수 등에 관해서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최종건은 선경직물 기술자들로 하여금 조제트 개발에 전력을 다하라고 당부하였다. 당시 조용광은 기술·영업담당 상무를 겸임하면서 서울사무소와 수원공장을 오가며 조제트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깔깔이는 어떻게 돼가나?”
최종건이 수원공장에 내려오기만 하면 기술자들에게 묻는 말이었다. 이미 조제트는 채 완제품이 나오기도 전에 ‘깔깔이’로 불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선경직물은 1965년 11월 조제트 제직용 가연사를 생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미터당 2,700회선으로 가연한 실을 100℃의 온도로 30분간 스팀을 해야 가연사를 만들 수 있었다.
선경직물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 낸 조제트는 일제 조제트 못지 않을 만큼 품질이 우수하였다. 다음 해 여름 시장을 겨냥하기 위해 선경직물은 조제트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었고, 1966년 5월부터 본격 생산에 돌입하였다.
선경직물의 조제트는 시장에 내놓자 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제 조제트 밀수품의 경우 한 마에 8,000원을 호가할 때였는데, 선경직물에서는 마당 700원에 출하하였으니 품질은 물론이고 가격 경쟁력에서 월등하게 앞섰다. 더구나 조제트의 생산원가가 마당 150원 정도였으니, 일제보다 열 배 이상 싼 가격에 팔아도 무려 네 배의 장사가 되는 셈이었다.
“어서 빨리 깔깔이를 내놓으시오.”
동대문시장 도매상들은 수원공장까지 돈을 들고 찾아와 아우성을 쳤다. ‘깔깔이’는 출시되자마자 선경직물 조제트의 대명사가 되어 당시 한국 여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비수기인 여름철 국내 직물시장을 석권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물업계의 수출 주력품목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선경직물의 효자 노릇을 단단히 하였다.
출처: http://www.skcf.or.kr/contents/contents04-02.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