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때 오늘날의 세종회관 뒷동네에서 살았다. 도렴동이라고... 광화문 네거리의 서북쪽으로 신문로가 나있고, 중앙청 쪽의 대로 사이로 난 길을 인왕산을 왼쪽, 그리고 북악산을 바른쪽으로 바라보면서 걷다가 보면 바로 세종회관의 뒷편이 된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의 6-25사변이 나기까지 전차를 타고 가끔 서울 운동장엘 가곤 했다. 그리고 효자동 종점까지도 전차여행을 했었지만, 주로 걸어서 자하문 밖의 세금정 골짜기에서 목욕도 하고, 자두도 따먹으면서 돌아오면서 경복중고교의 인근에 있는 수많은 무당집을 지나 다녔다. 궁정동이란 그 인근의 동네다. 그 근처에서는 늘 굿판이 벌어졌었지.
그러한 전차가 일본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알았었으나, 오늘 아침에 알게된 사실은 실상 고종황제가 전차와 전보 그리고 전화시설을 처음 도입했었다는 놀라운 뉴스를 접한다. 일본사람이 한 것이 아니란 얘기다.
지금은 전차를 구경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San Francisco의 거리에 아직도 그곳의 명소의 하나로 관광을 위하여 운영하고 있다만, 아직 타보지 않고 있는데 언젠가 한번 옛 추억을 되살려 봐야하겠구먼.
禪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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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Mon, 16 Mar 2015 11:37:25 +0900 From: hariake2004@naver.com To: zenilvana@hotmail.com Subject: FW: : [1등국민] 국민이 꼭 알도록 일본의 잘못된 인식을 전합시다
이 글을 읽는데 문득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 明成皇后弑害事件),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 1909년의 안 중근 의거(安重根義擧),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1919년의 삼일운동(三一運動), 1945년의 광복(光復) 같은 한일 근현대사관련 키워드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근 10여 년 전. 한 서점의 서가를 둘러보고 있는데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동경 대학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태학사, 2005)라는 긴 제목의 책이 필자의 눈에 띄었습니다. 책의 부제는 ‘메이지 일본의 한국 침략사’였습니다. 책을 구입한 필자는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읽었습니다. 강의록 형태의 그 책은 읽는 기쁨이 매우 컸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은
‘황제가 서명하지 않은 병합 조약’이므로 불법이라는 사실을 역사 자료를 근거로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저자의 강의를 들은 일본 학생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질문에는 부정 또는 반박보다 놀라워하는 기색이 한층 더 역력했습니다.
그 책에서 필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내용은 ‘경복궁 안에 설치한 최초의 전기 시설’ 이야기를 담은 꼭지였습니다. “1887년에 건청궁(乾淸宮) …… 점등한 것”(1888년 고종황제실록의 기록)과 더불어 “……서울에 전차가 달린 것은 동경보다 3년 먼저였습니다.”라는 구절을 통해 新문명기의 대명사인 전기 및 전차를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종황제가 능동적으로 조선에 유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필자는 그때까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인 전기 시설, 전차 시설,철도 시설 모두가 일본 강점기의 유산쯤인 것으로 지레짐작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소개한 서울의 전차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1900년 초 조선을 다녀간 한 독일 여행가의 기록을 인용한 구절이었습니다.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줄로 여겼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국민이 서구 신발명품을 거침없이 받아들여 서울 시내 초가집 사이를 누비며 바람을 쫓는 속도로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구경할 수 있다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그 책의 저자가 인용한 문헌은 《겐테의 여행기(Genthes Reisen)》(1905)였습니다. (*註: 원문에는 ‘아침이 신선한 나라’)
그 구절을 읽으며 필자는 당시 독일인이 서울 거리의 전차를 직접 체험하면서 남긴 여행기에는 뭔가 더욱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아 원저(原著)를 구해 정독하고픈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오래전 절판된 원저 《Korea-Reiseschilderung(코리아-여행기)》(Siegfried Genthe, 1905)가 다행스럽게도 한국학을 전공한 독일인 학자 Sylvia Braesel 교수(Erfurt 대학, 1992~1996 연세대학교 방문교수)에 의해 독일에서 2005년 복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덕분에 필자는 1901년 조선 땅을 밟았던 원저자 겐테 씨와 조금 더 폭넓은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겐테는 제물포(Tschmulpo)를 통해 조선 땅을 직접 밟았습니다. 자신의 저서에서 그는 조선(朝鮮)을 ‘고요한 나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아침이 신선한 나라(Land der Morgenfrische)’라고 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금강산(Diamantberge)의 장안사(Tschanganssa)를 다녀왔고 제주도(Insel Tschedschu)의 한라산(Halassan)정상까지도 올라갔습니다. (註:한라산에 오른 최초의 외국인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고종황제를 알현(謁見)한 상세한 인상기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서울에서는 베이징과 도쿄, 방콕과 상하이에도 없는 전보, 전화, 전차 및 전기조명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는 구절이 오랫동안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