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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종두술과 정약용
글쓴이 : dkp 날짜 : 2014-07-30 (수) 03:04 조회 : 1979
종두술과 정약용
황 상 익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지금까지 인간의 노력으로 퇴치한 질병은 두창(천연두)뿐이다. (머지않아 소아마비가 두번째로 사라질 것으로 예견된다.) 두창은 1977년 10월에 소말리아에서 환자가 발생한 뒤로 지금까지 단 한명의 환자도 생기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마지막 환자 발생 2년 반 뒤인 1980년 5월 두창이 완전히 퇴치되었다고 선포했다.

  우리나라에서 두창이 사라진 것은 1960년대 초이다. 1961년에 마지막 환자가 보고된 이래 더 이상 두창 발생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까지도 두창은 크나큰 피해를 주곤 했다. 해방 이후만 해도 1946년, 1949년, 1951년에 크게 유행했는데, 특히 전쟁통인 1951년이 가장 심해서 환자가 4만명을 넘었고 사망자도 1만1천여명을 헤아려 치사율이 27%나 되었다. 60년 전만 하더라도 두창은 걸리면 4분의 1가량이 목숨을 잃는 무서운 병이었다.

두창, 인간의 노력으로 퇴치한 유일한 질병

  동서를 막론하고 두창은 오랜 동안 가장 무서운 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17~19세기에도 수시로 창궐하는 무서운 역병(전염병)이었다. 치사율이 30~40%나 되는 경우가 흔했고 살아남더라도 마비 증상 등 무서운 후유증을 남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두창하면 생각나는 ‘곰보’는 후유증 중에서는 오히려 가벼운 편이었다.

  인류가 두창을 퇴치할 수 있었던 것은 우두술이라는 예방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창의 확실한 정체와 발병 원인(두창 바이러스)을 알게 된 것은 20세기 초였지만, 예방법은 그보다 훨씬 앞서 등장했다. 우두술은 흔히 영국인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1796년에 처음으로 접종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20여년 앞서 벤저민 제스티라는 영국 농민(직업적 의사가 아닌)이 두창이 유행할 때 자기 가족에게 우두 접종을 하여 효과를 거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우두술을 보다 안전한 것으로 개발하고 또 널리 보급시킨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제너의 공적이다. 

  우리는 두창 예방법으로 우두술을 떠올리지만 그것 외에 인두술도 있다. 말 그대로 우두술(牛痘術)은 소의 두창(우두, cowpox)을 접종하는 것이고, 인두술(人痘術)은 사람의 두창(인두)을 접종하는 방법이다. 요컨대 종두술에는 우두술과 인두술 두 가지가 있다.

  우두술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개발된 비교적 역사가 짧은 것인 데에 반해, 인두술은 그보다 훨씬 앞서 인도와 중국에서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누가, 언제 인두술을 개발했는지 확실치 않은데 대략 서기 1000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두술이 터키를 통해 영국과 그밖의 유럽 나라들로 전해진 것은 1720년대이다. 인두술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효과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부작용이 큰 문제가 된 적도 많았다. 인두술은 종종 약이 아니라 독이었다. 하지만 우두술이 보급되기 전까지 인두술이 기여한 바도 인정해야 한다.

두창 퇴치를 위한 정약용의 탐구와 성과

  인두술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언제였을까? 정약용의 「종두설(種痘說)」에 의하면 1790년대 말로 여겨진다. 바로 이웃한 중국에서 몇백년 전부터 쓰이던 인두술이 유럽보다도 나중에야 알려진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두설」(박석무 옮김)은 이렇게 시작된다. “『강희자전』에는 ‘신통한 종두법에서는 무릇 두즙(痘汁)을 코에 넣어 호흡하면 나간다’라고 되어 있는데 …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정약용은 『강희자전』을 통해 인두술(종두법)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몰라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간행된 「정씨 종두방(鄭氏種痘方)」을 1799년에 구해보았지만 몇 장에 지나지 않는 간략한 것으로 궁금증을 다 풀 수 없었다. 

  정약용은 이듬해 박제가에게서 중국 의서 『의종금감(醫宗金鑑)』(1742년) 중의 「종두요지」를 얻게 되고 두 책을 종합해서 「종두방(種痘方)」을 펴냈지만 탄압을 받는 시기에 분실하고 만다. 정약용의 대표적인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 속의 「종두요지」가 이 종두방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분실했던 것을 찾았거나 다시 서술한 것일 터이다. 요컨대 정약용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인두술에 관해 최초로 저술해서 본격적으로 소개했으며, 그의 저술은 이종인의 『시종통편(時種通編』(1817년)으로 발전한다.

  정약용은 인두술뿐만 아니라 우두술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1828년 중국에서 간행된 토마스 스탠튼(Thomas Stanton)의 한역(漢譯) 우두 지침서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을 자신의 『마과회통』 부록에 수록한 것이다. 정약용이 우두술의 내용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시술까지 했을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지만, 우두 시술에 꼭 필요한 두묘(痘苗) 취득 등을 생각해볼 때 가능성은 많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정약용은 『마과회통』 서문에서 사대부로서 정치 일선에 나가 백성을 살리는 것과 의술로 백성을 살리는 것이 한 가지임을 설파했는데, 두창 퇴치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모색한 데에서도 정약용의 정신과 활동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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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종두술과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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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학의 선구적인 천화(天花)를 예방하기 위한 인두술[人痘접종법]은 10세기 경에 중국 북송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러시아, 일본, 아라비아 및 유럽ㆍ아프리카까지 전파되었으며 1717년 영국에까지 전파되어 1796년에 우두종두법이 발견되기 전까지 쓰였다 함.

인두접종법

비공(鼻孔)에 접종하는
1. 두장법(痘漿法)
2. 조묘법(早苗法)
3. 수묘법(水苗法)

환자가 입던 옷을 입는 방법
4. 두의법(痘衣法)

비유하자면 화약을 중국에서 발명하고 유럽으로 전해진 후에 대포발사에 쓰이는 용도로 하여 대포를 중국이 재수입한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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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마(痘麻)에서의 '두'와 '마'는 다름.

1. 痘는 천연두,
2.  麻는 麻疹, 홍역: 李獻吉의 醫惠에 보답코자 다산의 마과화통, 麻疹奇方 主내용.

천연두의 별명은 天花, 天痘, 天行, 天行痘, 天瘡, 두창(痘瘡), 두진(痘疹), 瘡, 登百歲瘡, 天行發斑瘡, 疫癘포瘡, 豌痘瘡, 百日瘡, 虜寄瘡, 마마, 곰보 

이 禿筆은 美 약사, 중의학 Ph.D., NCCAOM delegate of Chinese Medicine and acupuncture로서의 댓글입니다.  


다산이 아래의 장염(張'玉炎') '종두신서(AD 1741)' 문헌을 참조했는지, 혹은 E. Jenner(1796)에 의한 1989년 간 李庚稙, 후루시로 바이케이(古城梅溪), 아사카와 마츠지로(麻川松次郞), 1899년 간 池錫永에 이르는 종두개념으로 1828년 토마스 스탠튼 한역 '신증종두기법상실'에 의했는지 불명함.

그러나 다산의 마과회통은 정조 22년 1798년에 기록되어 여8유당전서 제 7집에 실려있는 바,  
인단록(人端錄). 두진전문서. 연대불명 明 서겸(徐謙) 편. 이 明에 전염성 천연두 방제를 13科의 하나로 독립됨.
두진전문비서(痘疹專門秘書). 1568 萬全 저술
두진금경록(痘疹金鏡錄). 1579년 明 옹중인(翁仲仁) 편. 현존하는 것은 증보개정판.

두진대전팔종(痘疹大全八種). 1601 明 오면학(吳勉學)이 아래 8개 서적을 포괄.
1. 宋 錢乙 類證注釋錢氏小兒方訣
2. 宋 聞人規 痘疹論 1235년 刊
3. 宋 陳文中 小兒痘疹方論 
4. 明 蔡維藩 痘疹方論
5. 陳蔡二先生合幷痘疹方
6. 明 魏直 博愛心監
7. 작자미상의 痘疹寶監
8. 明 郭子明 博集稀痘方論

痘疹四合全書. 1676 淸 吳學損
종두신서(種痘新書) 1741 淸 張'王炎'. 種鼻痘法
吳겸 主編 醫宗金監 권 56~59. 1742 
인두략(人痘略) 1817년 淸 구희(邱熺) 편. 종두의 부위, 필요성, 조섭, 치료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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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를 '광무 2년(1864년) 李庚稙, ..'으로 바로 잡습니다.

그리고 다산이 우두에 대하여 知悉한 범위가 10세기에 北宋에서 시작한 인두접종법을 내포했는지의 여부는 불명하지만 
그러나 이미 북송나라 인두술에 대한 자료전파 800여년이 초기에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음.

지석영이 엮은 '우두新說(1885)' 編:에서도 이를 기록함. 

상권에 金弘集ㆍ李道宰 序, 저자의 自序, Edward Jenner의 牛痘考, 우두續考, 영국의사 Habson의 婦嬰新說의 내용인 種痘論, 論牛痘의 내력, 淸 邱熺의 '人痘略(1817)'序, 인두략을 重刊한 曾望顔의 序, 趙蘭停 傷科秘旨(1852)의 增補牛痘三要序 

하권에 小兒接種法ㆍ眞痘ㆍ假痘ㆍ種痘ㆍ時宜辨ㆍ種痘中禁忌ㆍ手痘後須知ㆍ小兒痘漿採取法ㆍ痘苗製造 및 蓄藏法ㆍ採痘痂收藏法ㆍ犢牛種痘 및 경과, 犢牛採漿法ㆍ犢牛飼養法 및 方藥 

부록에서 繫(계)牛床圖ㆍ種痘器具類圖 및 雪峰의 牛痘行.
이상으로 Edward Jenner가 우두種法을 현대화한 것에서부터 이에 대한 漢譯書 소개, 우두의 접종 및 치료에 대해 기록함.  

그리고 전라경상兩道우두敎授官 金仁濟는 지석영이 전남 강진에 유배된 1887년 이후로 1893년에 이르는 6년여의 기간에(지석영이 풀려나 우두保嬰堂 설립) 지석영의 우두신설을 재편한 李在夏 濟嬰新編과 유사하게 우두新編을 펴냄.
이 내용에 Jenner, 위에 언급한 조란정, 李秋溪, 당시 내무부 위생국 우두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 등의 우두법을 종합.
그 우두전습과정 用藥賦에서 병증에 따라 升葛湯, 解毒湯, 白龍散 등 수종 방제를 함께 수록하여 젠너 의술이 전래되는 과정에서의 자주적 노력과 수용태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결어:
좋은 것 듣고 보고 읽고는 못 참는 경세가인 다산이 1836년 이전의 두묘채취에 대해 다분히 알고 있던 시대에 산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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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 韓의학에서 마진[홍역] 전구(前驅)증상: 
Filatov Dukes(1847-1902)' 病證, 또는 구강 점막에 작은 흰 점을 감싼 빨간 점: Koplik(1858-1927)'s spots이 나타남으로 홍역에 감염된 진단의 일부로 한다면 병리학이 발달되지 않은 구습으로는 이마 위에 머리칼 나기 시작하는 전발제(前發際) 피부에 마진 초기에 홍진(紅疹)이 몇 점 숨어있다가 하루 이틀 지나면 속속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것을 보점(報點), 또는 보표(報標)라고 불렀읍니다.     

환부에 淨小한 顆粒이 있으면 疹, 이 것이 없으면 斑.

痘疹의 경우는 귀, 엉덩이, 발바닥이 차고, 또 귀 뒤에 紅縷와 赤脈이 나타나고 心胸間에 좁쌀같은 細點이 나타나는 것이 眞症에 가깝다라고. 
처음 발열한 3일은 감기와 비슷하고 初熱로부터 報痘에 이르기까지 傷寒의 六經病症과 비슷.

6일 이후를 雜症, 報痘로부터 수엽(收靨)에 이르기까지를 常症, 증세가 異常한 경우를 變症, 水痘와 斑疹을 類症, 不治에 이른 것을 壞症, 餘毒을 差症(의학입문).

(人)두진접종의 방법으로 피부에 접종할 때에 상처를 내는 삼능침, 도침(陶鍼, 瓷鍼)을 사용하지 않았고 

痘漿法에서는 마마에 앓는 아이의 痘에서 나오는 신선한 진물을 접종할 아이의 콧구멍 속에 넣어 두를 발생시킴.

한묘법(旱苗法): 환자의 痘痂를 취해 細末하여 끝이 구부러진 銀管 끝에 놓고 피접종자의 콧구멍에 불어 넣는 일.
7일 후에 열이 나면 종두가 형성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코의 점막을 자극하여 콧물이 나와 종두가 씻겨내려가 접종의 효과가 낮음. 

水苗法: 痘痂 20~30알을 細末하여 淨水 혹은 젖 3~4滴을 넣고 고르게 섞은 후에 깨끗한 천에 얇게 펴서 대추씨 모양으로 만들어 콧구명에 집어 넣는다음 12시간 후에 빼낸다. 7일 후에 발열하고 두가 발생하면 종두에 성공한 것인데 이 방법이 비교적 실용성이 있섰다 함.

痘衣法에서는 마마를 앓는 아이의 옷을 건강하고 두가 없는 아이에게 2~3일간 입혀 종두시켜 옷을 입힌지 9~10일 정도되어 발열하기 시작하면 종두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지만 성공률이 낮으나 두가 돋아나는 증후가 비교적 완만함

그러나  젠너에 의해 다량으로 순수배양 및 멸균된 표준화에 자침이 보편화되어 예전의 윗 방법이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오직 기록만 남이 있을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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