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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노라
글쓴이 : dkpark 날짜 : 2014-08-31 (일) 04:24 조회 : 2035
임진왜란이 끝나고 간파쿠(關白 1585년), 무관총리 대정대신(1586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해진 명나라 국서.

 지 오 석 일 특 어 순 기
 함 희 지 본 봉 유 은 건
 습 총 어 국 이 회 가 어
 관 비 명 왕 위 자 점 공』

완악한 마음을 가다듬으라. 
예우하나 어명으로 베어버릴 수도 있노라.
이에 잘 달래며 대신 너를 일본국왕으로 특별히 봉하며 칙어로 네게 하명하노라.
황제가 남달리 사랑하여 내리는 광영에 오홉도다.
선대의 봉토와 작위를 승계하는 하교를 연꽃함에 넣어 보내노라!

일본천황 후양성 경장(庚長) 2년(1596년 9월)에 명나라 신종 24년에 사신 양방형을 일본에 보내 천황비를 서로 나누고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교지. 

까닭은 5년 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를 통해 게이텐스 겐스(景轍玄蘇)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침략하는데 조선땅을 경유지로 빌려달라는 가도입명(假道入明)의 요구가 거절되고 같은 해 정명가도(征明假道) 요구를 재차 거절함과 동시에 일군이 침략해와도 분쇄할 수 있겠다는 전략적인 분석 때문. 

위의 글은 마치 그 진나라 소후백왕의 아내가 반중에 쓴 회문체 같음.
오키나와(沖繩)는 1372년부터 명나라의 번(藩)속국이 되었기에 일본 본토를 속국으로 삼으려는 명나라로부터 일본에 보내어진 칙서.

중국이 일본을 속국으로 삼으려는 역사.
일찌기 귀산장군이 집정하던 흥안천황 3년(1281년)에 고려 김방경과 원나라의 삭도가 이끄는 연합군이 재침하여 지가도를 공략하나 태풍의 영향과 호조 토키무네(북조)의 항전으로 실패.

쿠빌라이가 사신 두세충을 일본에 회유사로 파견하여 원나라가 종주국(suzerainty)이 되어 일본을 번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으려다 거절당하자 홍다구(1277년/홍복원의 아들)를 정동행원수로,  정동행 중서성을 합포[마산]에 설치(1280년)하고 일본공략에 나섰으나 전패당한 사건.

이에 히데요시가 '뿔'나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남.
이 전쟁을 일본에서는 분로쿠ㆍ게이쵸의 역(文祿ㆍ庚長の役),
명나라에서는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이라고 기록.

히데요시는 나고야 성에서 작전회의를 소집.
그의 스승 마추시다[송평], 동대문으로 입성했던 유키나가[행장], 남대문으로 입성했던 기요마사[청정], 양자 우키다[우희다], 벽제관을 공략했던 고바야카와[소조천], 사천 전투의 요시히로[의홍]에게 두 번째 전술을 지시함.

"풍진에 모인 뜻은 남에게 뒤떨어지 않음을 분명히 독하게 보임이다.
인도까지 점령하려는 전략. 
양자 하시바(羽柴秀吉. 혼노지 변란(本能の變)으로 죽은 오다 노부나가[직전신장]의 4남)는 전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거부한 양자 24살 조카 히데추구[豊信秀次]에게 할복하라고 명령했다.  
이 번 전투에서는 혹독하게 복수하고 그 증거(Proof of Duty Done)를 가져오기를 명하노라."

이에 나베시마[와도직무. 1537-1619]가 조선인의 성을 일본풍으로 개명하고 징수하자고 조서계획서를 히데요시에게 제출.
이른 바 '우풍진지회, 필유능소지'.
한편 그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내정됬던 그 조카는 히데요시가 아들 히데요리를 낳자 할복자살.

조선은 개 밥의 도토리, 명나라 신종이 일으킨 그 칙서로 인하여 조선 땅에 다시 전란의 회오리가 불어왔음. 
조선땅은 어물전에 매달린 홍어좃. 이 ?도 지나가며 만져보고 저?도 만져 보고.
죽어나느니 선량한 백성.

그리하여 임진ㆍ정유재란에 일본군에게 식량이 떨어지자 울산에서는 명군의 시체를 먹었고 전투 중에 살륙한 증거로 1597년에 나게시마 나오시게[와도직무] 부대가 5,444개, 기카와 히로에[길천] 부대가 18,350개 그리고 사천전투에서 요시히로[의홍]가 33,700개의 코를 베어 일본으로 가지고 가 교또의 귀무덤(괵묘)에 묻었음. 

이순신 장군의 일기에 경상도 좌병사 김응서를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 같고 차리리 자결했으면 좋겠다'고 기록함.

김응서(金應瑞. 본명 김경서 金景瑞). 육군 출신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와 같은 쓰시마(대마도) 출신 요시라[要時羅, 카게하시 시치다이후 梯七大夫]가 조선과 명(明)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하고 통역하는 무관 겸 고니시 유키나가를 위한 첩자를 역이용.

유키나가와 기요마사는 히데요시를 위한 규슈 전쟁에 대첩한 이후에 히고노 쿠니(肥後國) 땅을 반반씩 나누어진 사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음.

그 유키나가는 기리시당[크리스챤]. 예수회 토레스(Torres) 신부로부터 아우구스데이오스라는 영세명.
선봉대장인 그의  군기(noboli) 깃발(banner)은 마름모 안에 한 개의 글자 '으뜸 본'(本), 세모꼴 독기(standard)에는 하얀 술이 달린 하얀 원뿔 위에 빨간 원반.

선봉대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군기는 일련종(Nichiren sect)을 찬미하는 흑백색 글자.-남묘호렝객꾜(남무묘법연화경 Sadharma-pundrika Sutra).-법화경
지휘기는 일곱 톱날의 삼각기(burgee), 그의 집안의 문장(monor)인 동그라미.


이들이 전쟁 중의 잔인함으로 말미암아 허울같은 인간의 종교를 비난할만 했음. 

김응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천적(天敵)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재침해 오는 정보를 우리나라에 제공했음에도 이 장군이 미리 바다에 나가 기요마사를 대기하고 있다가 격퇴하지 않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결국 이 장군이 나라의 왕을 무시(斯國朝任無君罪)하고 적군의 움직임을 따라 작전하지 않아 나라에 짐을 진 죄(縱賊不計負國之罪)로 죽을 받을 뻔 했으나 역전의 승리를 감안하여 간신히 죽임을 면하고 정치계 출신 도원수(총사령관) 권률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됨. 이 때문에 모친상을 당하고도 권률을 찾아가야 했다고 난중일기에 남김.

사실은 가토가 이미 상륙하여 다대포 암남공성과 몰운대 사이 호로곡에 옹성을 치고 있섰기에 쳐들어 가보았자 패배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에 공격을 하지를않았다고 직위해제. 당파싸움으로 인한 유성룡 일파에 대한 공격일 수 있겠음.
유성룡은 이순신과 동문수학. 문인으로 가고 이순신은 무인의 길로 갈라섰음.

이순신은 유성룡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체격이 더 크고 늠름하여 전쟁놀이에서 대장노릇.
"성룡아, 난 아무래도 무관이 돼야 할 것 같아."
"그 생각은 잘 한 거야. 너는 체격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무관이 제격일꺼야."
" .......... "

그 후 이중간첩 요시라에 대한 명나라,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정유재란이 끝나고 명나라에 보내진 61명의 포로(1599년) 중에서 두 명의 히라(平秀政, 平正成)씨가 능지처참될 때에 나머지 59명과 함께 참수됨.

한 편, 이순신 장군 해군이 카메이 코레노리[구정]가 간파쿠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하사받은 금부채를 빼았고, 그 명랑해전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래도]가 전사(1597년)한 후 히데요시는 일본군이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교전금지령.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일본군의 퇴각.
향우지탄(向隅之歎).─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탄식.

절호의 기회 1598년 11월 18일. 청명한 날씨. 
이 장군이 관음포(觀音浦)에서 70 척의 수군 1,500명을 매복하고 명나라 진린(陳璘)의 수군 400척을 죽도 뒷 편에 배치하고 고니시 유끼나가[소서]의 노량(露梁)해협 퇴로를 막을 때에 쉬마츠 요시히로(도진)의 200척의 함선이 손실.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육지로 막힌 관음포로 향하는 일본 수군을 추격할 때에 갑옷을 벗고 지휘하면서 그들의 빗발치는 실탄에 맞아 돌아가심(1598. 11.19 자정~새벽 2시. 하현 보름달 7/8 크기). 
갑옷이 몸을 움직이는 순발력에 불편함을 인정한다.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맞섰을 때에도 갑옷을 벗었음. 수하 녹도만호 정운(鄭運) 역시 목판을 관통한 대조(大鳥)총탄에 명을 달리 했음. 

이 장군의 기록을 보면 나라를 위해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섰기에 이 장군이 갑옷을 벗음은 자살행위가 아니라 살려고 하면 죽고 자기 한 목숨 죽음을 각오하면 살리라는 독려로 해석해도 좋을 것임.

이 장군의 일기에 자신이 해변에 서 있는데 넓은 바다에서 큰 함선이 자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그 배와 자기가 순식간에 부셔져버렸다'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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