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시물 63건, 최근 0 건
   
42. 독도영유권에 대한 솔로몬 재판
글쓴이 : dkpark 날짜 : 2014-08-29 (금) 05:02 조회 : 2259
솔로몬왕은 영적 지혜로 자기나라 말로 모르는 것이 없섰다.
그가 맡은 처음 재판에서도 아이의 생모를 밝혀냈음.

지난 60여년 간 일본은 독도를 대나무 잘라오던 남양군도 타케시마(take 竹, shima 島)로 오해하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도문서를 모르는 것이 없는 영어 문화권 언어로 번역해 놓으면 좋겠음.

그러나 독도에는 대나무가 큰 적이 없다.
나카이 요사브로는 독도는 석도石島[돌섬], 두 개의 바위섬, 갈대만 있지 나무가 없다고 기록했음.

다케시마(Takeshima 竹島죽도)이든 마추쉬마(Matsushima 松島송도)이든 동경 131도 51~52분, 북위 37도 14분에 위치한 '리앙코트 암석' 독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 '석도(石島)'는 고종임금 때 붙인 것.
그 전에는 삼봉도(三峰島), 가지도(可支島).

그리고 측정오차에 대하여 가시적 거리에 존재하는 지리적 정밀도는 서로 수송가능성(transferability), 거리마찰(distance decay)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 한 한 공간적 교류를 실현하게 할 수 있다는 메케니즘을 받아주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측정오차가 가시거리 범위, 수평선 이내의 거리라면 이해할 수 있다고 함. 그러나 리앙쿠르호가 측정한 독도의 다음의 경도로는 수평선 넘어의 먼 거리오차. 
 

독도 경위선을 처음 측량한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 호가
독도의 위치를: 동경 129도 35분 21초, 북위 37도 14분.

정확한 쌍바위 위치는
독도 서도 위치: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
독도 동도 위치: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

지역구 시마네(島根)현(縣) 고시 제 40호(Shimane Perfectural Notice # 40, 1905. 2.21)에 주장한 오키시마(隱岐島 은기도)서북 85해리 
다케시마의 위치:동경 131도 55분, 북위 37도 9분 30초

그러나 그 당시에 리앙쿠르호(號)에서 측정할 때 가시적 거리인 수평선 거리(4.5 km)보다 40배의 경도 측정오차 182 km를 냈는데 시마네 현(縣)에서 제출한 독도 위치 측정치는 정확한 지점 독도로부터 경도 7.5 m, 위도6 m의 오차를 의미하므로 독도에 위치에 대한 대한 이러한 정밀한 측정치는 후일에 삽입한 위조문서라는 증거당시의 측량술로 이렇게 정밀할 수 없기 때문.
 
까닭은 레이다 기술이 없서 미드웨이에서 대파당한 일본.
현재의 일본 레이다 기술과 천양지판. 
미국과 달리 패망한 1945년까지 사람의 감각-청음기와 망원경으로 전술을 감행했던 것. 
그러므로 위성촬영, 네이비게이터, 레이더 등 관측장비가 없던 1905년에 독도의 위치를 경도 7.5 m, 위도 6 m의 오차로 측량할 수 없음.

지도학 발달사에 비추어 볼 때에 시마네현 고시 3년 후인 1908년 일본 수로국 대감(大監) 아라바다 이와지로(荒畑岩次郞)가 朝鮮東岸竹島(隱岐島)[조선동안죽도(은기도)]에 대하여 1:18,204 축척(탈코드법)으로 동도를 여도(女島), 서도를 남도(男島)로 명명하고 작성한 지도가 일본 실측경위도원본에 수록되었지만 경도ㆍ위도에 대해서 불정밀.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San Francisco Peace Treaty, The Treaty of Peace with Japan)에 연합국에 제시한 일본 측 조선영토경계선은 두만강(豆滿江. 圖們江. Tumen River)으로 부터 하향하여 쓰시마(Thushima) 해협까지, 조선영토 동단은 동경 132도 40분, 북위 30도 30분까지. 즉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령.

Utsuryoto[울릉도]와 넉 점(點)의 도서가 조선 땅.

역시 일본 전함 니타카호 항해일지에 독도를 가리켜 '랑코 도(Lian-court Rocks), 높이 40피트. 경사가 심하여 올라갈 수 없다로 기록.

메이지(明治) 3년(1870년) 簪本玉蘭(잠본옥란) 大日本四神全圖(대일본사신전도)에 Takeshima(타케시마, phantom Ullengdo), Matsushima (松島마추시마, '소나무섬, 소나무를 베어오던 real Ullengdo'), Liancourt Rocks[리안고르도暗礁암초]로 기록되었고,

메이지 정부 자문각료단(advisory body)이자 권력기관인 타이조칸(大政官)에서 우리나라와 분규가 있는 영토변경에 대하여 1877년에
'다케시마(竹島[울릉도]), 外(외) 一島(일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어보(御輔 [법령])를 내렸음.

한 번 메이지가 내린 법령은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의 헌법'에 헌법과 같이 유효하다고 명시되었음.

명치천황(Meiji Tenno)은 즉위하던 해에 지난 제 56대 청화천황 정관 8년(866년. 신라 경문왕 때) 첫 관백인 양방기경으로부터 제 120대 인효천황 관백 가경(1867년)까지 1,000년간 지속되어 오던 천황의 자문관 칸바쿠(關白. the Chief Adviser to the Emperor. 무관정방정치)를 폐지하고 세력을 약화시킨 자문단을 설치하고 전권을 휘둘렀던 바 케임브리지 인명사전에 의하면 장군제(制)를 폐기하고 천황식탁(Imperial Diet)을 차리고 봉건제도를 철폐하고(1871년) 개혁 및 근대화계획 정치를 했기에 명치천황이 말하면 [호랑이] 법이었음. 

그러므로 2009년 아스타로 총리가 국회에서 태정관 지령문에 대한 질의를 받자 '말할 수 없다'면서 답을 기피했음.
그는 자민당 총재겸 내각총리대신 아소타로(麻生太郞. 68세. 아소내각 2008.9.24~2009.9.16)

우리나라 어문에 '독을 깨다', '강진군 독다리 Dokdari' 石橋, '신안군 독산 Doksan 石山', 독도를 한자 표기로 '獨島', 돌, 높은 것을 '독', '둑, 뚝 纛, 독섬[纛, 뚝섬 纛島]. 

일본 해적상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선박제조용으로 소나무 벌채를 해가면서 그들이 마추시마(松島)라고 불렀음. 

이에 1882년 고종임금은 이규원을 울릉도에 파견한 결과 거주자 32 %가 전라도 사람인 것을 확인.
전라도 13개 지역이 '石(석)'을 '독'으로 풀이. '독'을 '석'으로 표기.

1897년 유몽정(柳夢井)을 선봉대장으로 울릉도에 파견한 결과 일본인 70명이 난입해 들어와있음을 발견했고, 1883년에 김옥균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독견하게 하였다.

나무를 남벌하면 황무지로 변함.
그 예가 러시아와 프러시아의 공격 및 퇴각로였던 쿠로니안 석호(Curonian Lagoon). 평저선 선조용으로 무성한 소나무숲이 사라지고 황무지로 변한 가단스크(Gadansk). 벌채는 하루면 되지만 그 수림이 다시 이루어지려면 60년 내지 100년이 소요.  

이에 1900년에 고종임금이 울릉도 수목을 보호하고 영토를 천명하기 위해 칙령 41호로 독도를 '石島(석도)'로 이름 붙이고 울도군[울릉도] 관할로 정했기에 주인이 없는, 무주물(無主物) 독도가 아니었음.  

『조선삼림식물』 발간으로 카츠라 공작으로부터 기념수상(1927년)을 받은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동경大교수는 일본 강점기의 조선 식물 3,176종에 대한 『조선식물경개』에서 

울릉고사리를 'Takeshima-shida다케시마-시다'
섬시호를 'Takeshima-shaiko다케시마-사이코'

울릉도 황백나무를 'Takeshima-kihanda다케시마-키한다', '竹島黃栢죽도황백. 鬱陵島特産(울릉도특산)'으로 분류함.

이로써 '다케시마(竹島)'는 독도가 아닌 '울릉도'.

일본이 조선침략, 만주침략, 그리고 노일전쟁에서 승리하던 해, 1905년 2월 22일에 일본의 일부사람이 일방적으로 독도를 Takeshima라는 이름으로 시마네(Shimane) 현 오키섬(Oki Island) 관할로 정했음.

따라서 당사국 조선과 시비없이 없이 일방적인 선포는 원인무효.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이승만대통령이 대마도는 한국땅'이라고 응수.
1952년 1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긴급명령 12호로 '포척심판령' 제정공포. 평화선 내에 들어온 일본어선 나포명령. 
이 명령이 1965년 한일어업협정체결 때 역할 중지.

독도를 일본영령으로 표기할 것을 관철시킨 사람은 일본여인과 살던 일본정치고문관(주일고문관) 윌리엄 제이 시벨드(William J. Sebeld).
그가 독도를 일본령으로 명기해줄 것을 1949년 11월 14일자에 전문으로, 19일자에 서면으로, 1951년 7월 19일에 국무부에 요청. 

우리나라에 기회가 왔섰다.
1951년 7월 19일 한국동란 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미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를 만난 양유찬 주미대사는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잘못 불리우는 것도 모른 체, '독도는 한국 땅'이라자 '어디 있는냐는 질문에 명백한 위치를 모른 체 '울릉도 동 쪽에 있다'고 대답하여 8월 10일에 딘 러스크는 '그 섬은 시마네현 오키섬 지청의 관할이라는데?'라는 내용을 한국정부에 보낸다.

예습을 하지 아니한 이 양유찬 박사의 일순간 무지함이 '독도가 한국 땅, 일본 땅으로 뒤집히기를 계속'하여 49개국 참여한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이 무려 18차에 끝남.

독도가 포격당하여 원 모습이 아님. 
제 2차세계대전 종료 후 이 회의 기간에 발발한 한국내전.
연합국총사령부 명령(BCAPIN) 677호, 1033호에 독도는 한국부속령.

그럼에도 독도가 일본의 흉계로 폭격당한다.
1952년 5월 23일. 제 13회 중의원 외무위원회 야마모토(山本) 의원이 '독도 포격은 일본영토로 확인받기 쉬워서입니까;라고 묻자 외무성 이시하라(石原) 정무차관이 '대체적으로 그런 발상이다'라고 답변.

일본이 패망한 후 독도를 재일 미군의 폭격기지로 내정했기 때문.

1947. 9. 6. 연합국총사령부 명령 1778, 1951.7.6 명령 2160으로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으로 출마(당선 7.22)했던 1948. 6. 3에 독고포격으로 울릉도 어민 사상. 

이에 6월 17일에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포격연습장임을 밝히고 향후에 포격을 일체 중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1951년 사령부 명령 2160 재지정하고 이승만이 재선(8.13)된 직후 1952년 9월 25일에 독도현지학술조사단의 접근을 막았다.
이 때에 이시하라 정무차관의 후안무치가 '독도를 포격장화 하는 것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확인받기 쉽기때문이다'라는 답변.  

1953년 1월 20일에 주한미군사령부로부터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을 중지할 것을 예하 부대에게 지시한 보고가 있섰다.

 이 말은 어업인 대도(大盜) 나카이 요사브로(中井養三郞)가 장물, 남의 물건 독도를 염탐하고 내무성 안우에(井上) 서기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산국장 마키 나오시마(牧朴眞) 및 수로부장 기모스키 가네유키(付兼行)에 의해 독도가 무소속이라 추리하고 외무성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는 훔칠 것의 가부를 결정하고 일본이 먼저 들어가 망루를 설치하고 해저전선을 설치하여 적함을 감시하는데 유리하게 할 목적으로 영토편입의 시급성을 역설하여, 비록 도리가 있는 내무성 안우에(井上)서기관이 반대했지만 독도 편입이 이루어지고 1905년 독도에 망루 설치. 10월 24일에 철거. 

이로부터 4개월 후 5월 24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이 러시아 
로제스트 벤스키 발틱함대를 독도근처에서 최후 공격으로 승리하자 독도의 군사적 잇점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차츰 영해를 넓혀가는 경제적 발판으로 이용되어가고 있는 것. 

써니 2014-08-31 (일) 12:07
근래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중에 동해에서 일본한테 하면  안되는 양보를 하며 맺은 조약인가 협약인가가 큰 문제아닌가요?  

말도 안되는 큰 실수를 한 거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댓글주소
   

총 게시물 63건, 최근 0 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dkp님의 독도ㆍ정책연구소 +7 100se 07-29 1620
63  남북통일 올가미 골디안 매듭을 누가 푸나? +2 dkpark 01-27 3256
62  62. 독도에 소나무, 울릉도에 대나무 심자 +1 dkpark 12-31 3074
61  61. 굳세어야 할 우리나라는 동화도 짧아 +1 없음 12-27 3663
60  이런 계륵의 양수와 조조의 모사 순욱을 바꿔 야그하고 있었내.... bubza 12-24 3270
59  59. 을미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 없음 12-23 2887
58  58. 이석기, 김재연 발가락이 종북세력과 닮았다 +18 dkpark 12-21 1985
57  57. 당랑규선. 산 귀신이 헤살뜨는 국가기상의 고황병 +1 dkpark 11-17 1573
56  56. 이명박은 한발 한발 감옥으로 걸어가는데 김윤옥은 타랍에서 한발 한발 내려오네 +7 dkpark 11-12 1662
55  55. 전시작전권전환 무기한(?)연기론 그 이유 #2 +1 dkpark 10-28 1522
54  54. 한미 전작권 전환연기는 당연한 시세적응/한국측에서 본 관점 #1 +2 dkpark 10-28 1427
53  53. 빈호아(邊和)의 주월사 한국군 증오비 40년 +1 dkpark 10-10 1883
52  52. 노벨상. 따 먹지 못하는 그 신 포도에 돌 던지기 +1 dkpark 10-06 1691
51  51. 교리는 절대악. 참된 행복의 요청이 아니다 +1 dkpark 09-20 1549
50  50. 김대중의 나르시즘과 피그말리오니즘 +1 dkpark 09-10 2445
49  49. 강박관념에 고양이처럼 꽁하는 통치자 +3 dkpark 09-10 1370
48  48. 김대중ㆍ매국노-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선언하라. +3 dkpark 09-09 1450
47  47. 한국은 미국이 아니면 망할 것. 달팽이 싸움때문에 +2 dkpark 09-08 1735
46  46. 한심하게 정부각료, 관리들이 일을 안해 +4 dkpark 09-06 1548
45  45. 세월호 후유증의 비판적 검토 +2 dkpark 09-05 1381
44  44.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노라 dkpark 08-31 2050
43  43. 독도. 일본제국 방법론─팽창주의의 장난감 +1 dkpark 08-29 1578
42  42. 독도영유권에 대한 솔로몬 재판 +1 dkpark 08-29 2260
41  Re: 온갖 기술문명의 근본은 수학이다 dkp 08-18 1527
40  2. 다케시마는 일본인이 부르던 죽도(竹島) 즉 울릉도. 독도를 지칭함이 아님. +2 dkpark 08-09 1711
39  다케시마는 한국땅. 일본식물학자의 증언 +2 dkpark 08-07 1984
38  Re: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일 dkp 08-02 1520
37  Re: 실록을 지킨 사람들 +3 dkp 08-01 1380
36  Re: 정교분리의 의미 +1 dkp 08-01 1789
35  Re: 1929년 나주역 사건의 재구성 - 국사의 재구성 +1 dkp 08-01 1730
34  Re: 민(民)에 관한 갓난아이론과 호민론 - 국민은 허점많은 갓난애같은가? dkp 08-01 1379
33  Re: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 '공부한 본보기. 공부를 해야 하나'… dkp 08-01 1468
32  Re: 슬프고 힘들면 노래하자, ‘벤다 빌릴리’ 처럼 - 노래로 고셍을 잊자. dkp 08-01 1521
31  Re: 유학(儒學)과 천명(天命) - 천명, 과학과 민주주의. dkp 08-01 1594
30  Re: 헌쇠와 위공(爲公) - 헌쇠(古鐵) 박중기와 위공(爲公) 정수일을 생각하며 dkp 08-01 1490
29  Re: 공부는 왜 하는가? +1 dkp 08-01 1659
28  Re: 로텐부르크 성곽 도시 - 수원 화성에 대하여 dkp 08-01 1586
27  Re: 법정 스님이 사랑했던 다산 선생 dkp 08-01 1401
26  Re: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본주의 비판 +1 dkp 08-01 1507
25  Re: 흡연과 건강 담론 +1 dkp 08-01 1395
24  Re: 진실, 그리고 듣고 싶은 한 마디 dkp 08-01 1291
23  Re: 종교인과 과세 dkp 08-01 1393
22  Re: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dkp 08-01 1425
21  Re: 네 살의 아들이 죽어도 그렇게 슬펐는데 dkp 08-01 1441
20  『멸절의 평화. ENDANGERED PEACE. THE PETER PRINCIPLE』 +2 dkp 08-01 1655
19  Re: 식민지 근대화론은 타당한가? (2) dkp 07-30 1429
18  Re: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을까 dkp 07-30 1533
17  Re: 폭력 없는 학교 dkp 07-30 1372
16  Re: 통치 불능의 징후는 완연한데 +1 dkp 07-30 1476
15  Re: 다산의 명문장(名文章) dkp 07-30 1445
14  Re: 엘리트주의를 생각한다 dkp 07-30 1610
13  Re: 종두술과 정약용 dkp 07-30 1978
12  Re: 선비의 마음씨를 회복합시다 dkp 07-30 1363
11  Re: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참다운 의미 dkp 07-30 1556
10  Re: 茶山詩 독서일기(1) dkp 07-30 1451
9  Re: 큰 범죄엔 너그럽고 작은 죄에만 가혹한 세상 dkp 07-30 1364
8  Re: 친일의 변명과 옹호 담론 dkp 07-30 1329
7  Re: ‘얼빠진’ 나라의 ‘얼빠진’ 대학들 dkp 07-30 1432
6  Re: 이해할 수가 없다 +1 dkp 07-30 1494
5  Re: 국민의 수준 dkp 07-30 1389
4  현대판 조광조의 촌철살인과 공도 dkp 07-30 1554
3  Re: 분노하던 다산은 시라도 읊었는데… dkp 07-30 1432
2  Re: 세월호, 상징과 은유로 경고하다 dkp 07-29 1673
1  dkp님의 독도ㆍ정책연구소 +7 100se 07-29 1620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