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하지 않고 10여년이 흘러간 <주역변의(周易辯疑;뜻풀이)>를 이 열린 광장 좌판에 내어 놓았더니 선열반이란 괴물이 공격하기 시작헌다.
그 것도 변(辯)과 변(辨)의 차이점을 번역된 영어 어감으로 따지면서 말입니다.
그 영어로 번역된 것을 역수입하여 선교사가 한글 가르치듯 하우스 보이가 한문가르치듯 말 잘하기 때문이지요.
돼게도 헐 일 없나 보다. 하기사 말 못해 죽은 귀신 없다지만, ~~
저는 이 선열반에게 댓글 다는 것보다
형처(荊妻. 안사람)를 편하게 해주는 일이 소중하기에, 표백제 쓸 때에 장갑 낀 손을 보호해주기 위해 나무몽둥이를 깍아주고
모기장 덧문이 '꽝' 닫히기에 핀을 옮겨주고,
아마 한 달 넘게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 태양볕이 그야말로 작열한다.
금잔디가 따로 없다. 운전하다 보면 잔디밭이 거의 전부 노리끼리.
이 뿐인가?
그 폭염이 집안으로도 들어오기에 에어컨을 75℉로 했는데도 80이하로 않떨어진다.
부엌에 안팎으로 드레입, 베네챤 블라인드 역시 충분찮아 미다지 유리문에 강렬한 서녘 햇살이 비추이자 아내가 땀을 흫리며 치마를 훌쩍훌쩍 켜질한다.
그래서 11½피트 삼각 그늘돛을 쳐주고,
핸드카를 부드럽게 접히게 해 주다가 글자 뜻에 육두문자 쓰는 졘녕감에게 이제야 온 겁니다요.
제가 아는 것 없사오나 한문은
상형(象形)ㆍ회의(會意)ㆍ해성(諧聲) 문자이기에
사람들이 적당히 쓰면 사투리고 글자고 간에 그런가 보다고 그 것도 이해해 주니 예를 들어, 상(象)과 상(像), (形)과 형(型)의 혼동을 이해해주는 것이고,
지금 선열반이 영어로 번역된 변(辯)과 변(辨)의 어감차이를 잡언변백(雜言辨白)이라고
어감의 차이를 머리칼같이 세밀히 따지지 않고 넘어가주지만,
일단 논의되면 칼날과 같이 대쪽을 위에서 아래로 잘라 좌우 두 토막내듯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선열반 주지주의를 우리는 잘 압니다. ㅋ
그러면 '간나이 새끼 표절하지 말라'는 내용없는 악풀꾼 너 선열반과 요지경을 같이 봄세, 보자구나!
^-^ 辨과 辯 글자 부수(部首)에는 똑 같이 '고추가루 매운 신辛라면'이 두 번 강조되지요.
밝고 밝게 여러 사물의 다른 점을 미소한 정상(情狀)까지 생각해 보자는 의미지요.
그 수단 중에 辨은 칼로 짜르자는 거요, 辯은 칼로 하지 말고 말로 하자는 뜻이기에 변호사(辯護士)라 하고, 이와 반대로 공산당 '변증법적' 유물론은 '辨證法的'이라 하나 봅니다.
이 중에 저는 말(辯)로 하자는 겁니다요.
다시 말씀 올리자면 주역의 의미가 심오하다 하나 우리는 공자가 표현한 그 단어의 묘미, 즉 기기묘묘한 말에 인용할 흥미가 있기에 흑백논리, 대립적 사고방식의 편벽한 논리적 타성에 의해 그간 모르고 있던 가운데(中孚) 즉, 중간자가 존재한다는 유가와 히데끼(탕천수수)의 이론물리학에 그의 머리를 튕겨주었다는 데 유효한 말 모음집이라는 제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칼 융;1875-1961'이 사람들의 복잡한 인간성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임상실험하기 위해 주역을 인용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주역의 진의를 파악하여 인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1923년에 Richard Wilhelm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리차드版 독일어 주역을 그의 48세에 얼마나 이해했는지 궁금하고, 1967년 Cary F. Baynes₁에 의해 맛이 간 독일어 주역 영역판에 주역의 멋과 맛을, 집안에서 애들과도 오로지 영어로 말한다는 이 열린마당에서, 삼척동자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유명한 선열반이 마치 대추씨까지 삼키는 경우라고 비유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¹. Cary F. Baynes. The Iching.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써니2012-08-14 (화) 14:24
형처 荊妻
남에게 자기 아내를 낮추어 일컫는 말.
후한(後漢) 시대 양홍(梁鴻)이라는 사람의 처 맹광(孟光)의 이야기다.
맹광은 뚱보인데다 얼굴이 추하고, 게다가 얼굴빛이 새까맸다. 하지만 미녀에게는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손쉽게 돌절구를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세었다.
더욱이 마음이 상냥하고 그 언행에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마을에서는 평판이 좋아 사방에서 혼담이 들어왔으나 맹광은 계속 거절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른 살이 되어 버렸다.
맹관은 혼담이 들어오는 족족 퇴박하더니 양홍이라는 돼지치기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맹광의 부친이 양홍을 찾아가서 청혼을 했다.
"댁의 따님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기꺼이 맞이하겠습니다."
양홍이 청혼을 받아들이자 맹광은 양홍의 희망대로 신변의 일용품만 가지고 시집을 왔다. 이튿날부터 즉시 허술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트레머리로 하고 친정에 있을 때와 같은 복장을 했다. 양홍은 그러한 아내를 보고 흡족해 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아내다."
당시는 왕망(王莽)이 정권을 빼앗아 국호를 신(新)이라 칭한 때로, 그의 악정을 견디지 못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천하가 어지러웠다. 양홍은 학식이나 인품이 높아 사방의 반란자나 그 부하들로부터 끊임없이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혹의 손길을 피해 돼지치기를 그만두고 맹광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산속에다 양홍은 땅을 갈고, 맹광은 베를 짜며 2년간을 살았다.
이윽고 산속에까지 유혹의 손이 뻗치자 두 사람은 오(吳)나라에 가서 이름을 숨긴 채 어느 집의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살았다. 양홍은 매일 삯방아를 찧으러 나가고, 그 근소한 수입으로 겨우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맹광은 매일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고서 남편을 따뜻이 맞았으며, 밥상을 눈썹 높이 들어 공손히 남편에게 식사를 권했다. 常荊釵布裙 每進食 擧案齊眉(상형재포군 매진식 거안제미)
이 맹광의 고사에서 허술한 옷차림을 가리켜 형채포군(荊釵布裙)이라 하고, 부인이 예절을 다해 남편을 섬기는 것을 거안제미(擧案齊眉)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형처(荊妻)라는 말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