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을 축조했다고 해서 고구려를 포함한 흉노족, 몽고족, 여진족, 만주족이 중원을 향해 넘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삼국지(권2) 위서(魏書)에 예맥 포함 부여 선우, 언기, 우전 흉노왕의 피가 고구려에 실려 있다 기록했다. 중국땅의 원주민은 우리 민족이라는 증거★¹가 들어난다. 솔직히 우리 민족이 중원에서 쫒겨난 것은 황제, 요, 순, 우왕에 의해였다. 피라밋보다 더 큰 우리 선조들의 장군총 무덤이 중국 장안에 오리온별자리로 숨겨져 있다.
만리장성은 오로지 삼청교육대 작업. 품삯을 제대로 준 것도 아니요, 껄끄러운 놈들과 정적을 차마 생매장 차선책인 토목공사★².
진나라 승상 이사, 환관 조고, 진시황의 생부 여불위 등의 악취나는 숙청작업. 그러기에 변경에 쌓은 만리장성은 진시황의 야심찬 방어벽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만용의 젊은 장군 '이신'과 '몽염'이 승승장구하다 초패왕 항우의 조부 '향언'에 대파하자 몽염에게 군사를 풀어 주는 대신 눈에 가시나는 서민의 징발권을 주어 변경에서 쌓아 올린 눈물의 장성, 벽지로 축출된 징용간 이들에 의한 영원한 진지구축. 분서갱유를 반대하는 진언을 하던 충신이자 세자인 부소에게 대발노발하며 그를 또 몽염을 감시하라며 쫓아내어 만리길 그 10년 공사장으로 보냈다.
대저 산맥은 구불구불, 가지치며 점점이. 강물도 이를 따라 구불구불 유유히 흐른다.
'푸른 강 한 구비가 마을을 감아 돌아 흐르는데'(강촌)'─ "엄마야 아빠야 강변 살자. 강변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
'적절히 평년작이 되는 산하에'─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이 자연에 대해 하다 못해 주흥사의 천자문구 배열을 보라. 이 아득한 하늘 아래 흙이 고향이요(천지현황), 이 지나간 자취를 익히는것(습차완적)이 서민이요 나그네의 역정길이요,
땅이 고르지 않아 강물이 평평함을 싫어 하고, 가볍게 지침하고, 구절양장 휘어 돌다 곧바로 힘있게 내려가다 잠시 멈추는 물흐름의 강변의 문화유산을 뭉게지 마라.
강물은 영원한 것. 오히려 유유히, 도도히 흐르는 강물줄기를 건들지 마라. 강변과 구릉에 기거한 촌락, 향교, 학교, 사찰과 점점히 널려 있는 정자들. 오호라 이를 어쩌자고, 유유히 흐르는 완만한 물흐름을 멈추게 하여 문화를 물속에 잠기게 하려느냐.
아서라 마서라. 1만 미터에 겨우 1미터 낮아지는 우리나라 강물의 실정. 여기에는 준설장비로 강바닥 흙이나 파올려 냄이 제격인지 아시기나 하는지.
벽을 높이고 만리장성 축조와 뚝을 높이는 사대강 살리기 공사는 친환경적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²역사책 한서(漢書)에 '흉노족이 붕음(음사)스럽다, 초우인(jackstraw)을 세우고, 알타이(Altaic, Turkic) 까마귀 발자국처럼 보이는 설형문자(유병' 시:병목도아부작자)의 흉노족을 '신이 돕는다'라고 왕소군 시절에 영탄했다.
만리장성 축조의 시작은 흉노의 기병습격에 대비하던 동주(356 BC) 때부터 진시황을 거쳐 당나라 웅진삼번까지 판목을 넣은 토성으로 현하의 관광명소는 견고한 지역만을 보여주는 것.
축조한 장성의 역활은 고속도로로서가 아니라 외부세력 저항의 쇄국정책의 관문정책이었다.
카프카(Kafka.1924)는 징기스칸의 유럽 침공에 영향을 받은 독일, 항가리 집시의 말을 빌어 '중국의 대장벽'(Beim Bauder chinensischen Mauer[sic])이라 불렀다. 그 경계가 길이로 6,400km.
하지만 유럽에서 312 BC 경에 8만 km 공사를 시작한, 말하자면 경부고속도로. 아피아 승마가도(Appian Rotten Row)를 비롯, 오늘날의 30개국을 연결하는 살라리아(Salaria), 프라미니아(Flaminia), 아우렐리아(Aurelia) 및 오스티엔시스(Ostiensis) 대중로(via publica)는 유럽의 문화, 종교, 상품 그리고 군인이 이동하는 고속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