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초 이 dkp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온 미국내 신교도 아미쉬 10여만명을 상대로 성서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회개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ㅎㅎ(우리나라 사람 이 정도라니까 ㅋㅋ)
그저께 24일 밤 8시 30분경에 켄터키 주 남서부 지역에서 폭우 속에 마차를 타고 샛강을 건너던 아미쉬 일가족 9명이 급류에 휩쓸려 이 가운데 어린이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생후 5개월짜리 그리고 5살, 7살 그리고 11살 짜리 시체를 마저 찾았답니다.
이 애들이 무슨 자잘못이 있기에 죄를 받아야 합니까?
이 애들이 물에 빠져 죽었더라도 좌석벨트에 묶여 있는 체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급류에 마차안에서 밖으로 흘려 나갔던 겁니다.
참으로 눈물나는 참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 아미쉬 규범(ordnung. 아미쉬 교리)에 책임이 있습니다. 도대체 눈에 끼는 안경 이외에는 자동차, 컴퓨터, 전기 등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고의 경위는 문명의 이기 공중전화(Phone Shack)를 걸러 다녀오는 길이었던 모양입니다(ㅎㅎ 전화는 편리하니까 할 수 없이 사용하는 모양이지! 봉화불을 올릴 수도 없겠고 ㅋㅋ). 그리고
2. 미국 주정부, 시장, 군수, .. 당국자들과 주민생활 안전을 위해 예방 임무를 소홀히 한 경찰과 소방서원에 공동책임을 져야 됩니다.
저의 이 판단이 맞는다면
1. 미국의 챙피요
2. 아미쉬 종파는 이단입니다.
까닭은 무지 답답한 스위스 신교도 교주 '야콤 암만' 목사를 받드는 추종자들이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의 이주 첫 천로역정을 밟은 윌리암 펜(Penn)의 쇄빙(鎖氷)교리에 책임이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교주 '암만' 목사가 암만 성경을 몰라도 정말 너무 모른다 하겠습니다.
그가 만든 교리는 예수님이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에 기초를 두고 있는 원리주의인 바 그 올드눙(Ordnung. 교리)에;
『(우리 교파는) 세상에서, 그러나 세상사람들의 세상이 아닌~.-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를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 조항이 그들 헌법(우리나라 장로교회에도 '헌법' 있습니다) 제 1조, 그리고 제 2조는;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이 뜻은 성인이 되어야 세례¹를 준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서적입니다. 그러나 아미시 헌법 제 1조에 우려한 바대로 로만 가톨릭성사를 답습한 개신교 종교지도자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은 성서에 맞지 않게, 부모가 데리고 온 아희에게 어릴 때부터 세례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가라지만 장로교 창시자인 캘빈이 유아영세를 시켜주지 않은 어머니를 마귀라고 판단하고 '마귀사냥'을 했습니다. 이, 그러기에 캘빈이 웃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들 '아미쉬'는 유아세례(유아영세)'를 부인하고, (이 dkp 의 보충설명을 겯들이자면;세례 요한이 어른들에게만 세례 줬듯이 개신교 일파인 아미쉬는 사람이 철이 든) 16세부터 25세 사이의 "신자의 침례"를 베풀어 침례교단으로 부터 박해를 받아 뿔뿔히 흩어지게 된 바, 역시 1,700년 경에 미국으로 이주해 왔던 것입니다. 캘빈 장로교회에서 못하니까 침례교회에서 날 뛴 겁니다. 이를 두고 망둥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뛰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미시 교파도 역시 그 세례의식의 '때'를 성서에서 발견하고, 무슨 컬럼버스 달걀이나 올려 세운 것 처럼, 그 무슨 지혜의 횡재만난 것 처럼 기존종파와 결별할 당위성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이 '그러나'가 제일 중요함) 아미시 헌법 제 1조에서 세상의 문물을 받아드리지 않아야 된다는 속성으로 확대함은 비성서적입니다.
악인의 통치, 압박에 대해 '세상사람의 것, 카이샤의 것"이었지, 세상문물의 이기(利器)가 카이샤의 전유물이 아니고 인류전체를 위한 복지문화 과학문명입니다.
이점 아미쉬가 크게 오해하여 비록 자동차를 거부하지만 아버지가 몰고 가는 마차수레, 대중교통수단인 역마차(버기. buggy)에 안전벨트를 의무적으로 설치한다고 하여 자기들 헌법 제 1조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이 dkp는 풍차, 물레방아, 돔으로 된 사료발효탑(사일로), 길에 공작이 걷는 매우 흥미로운 광경, 그들의 전원풍경, 네필의 말을 부려 밭을 쟁기질하는 400년 전의 농법에 흥미를 느끼며, 그들이 주님의 이스라엘 시온을 그리는 성지순례 소망, 올리브 동산, 겟세마네, 갈보리를 꿈꾸는 믿음의 향수를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역시 그들이 관광객을 부르려고 표시한 아미쉬 마을(The Amish Village)에 학령기의 애들에게 한정된 교육으로 세뇌시키는 교육방침이든, 잔자크 룻소의 에밀(Emile; or, on Education), 헨리 브룩(Henry Brooke)의 '질적(質的) 바보(The Fool of Quarlity)', 에라스무스의 '바보예찬'론 교육이든 나무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오해된 교리, 무지한 사목활동으로 문명의 이기가 신앙의 가치를 떨군다 하여 비록 운송기관으로 자동차 이용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18세기 생활방식으로 과거 속에 살기에 흥미로워 찾아가는 매 관광객마다 $8.25를 받지만. 믿음의 교인을 떠나 그곳 주민의 안전관리로 공익을 위하고 공리적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일찌기 주께서 "담벼락이 허물어져 수십명이 죽었는데 그 사람들이 죄가 있기에 죽었느냐고 생각하는냐? 아니다~~"란 실제 있섰던 일을 예화로 드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그 죽은 불쌍한 애들이 죄가 있서 죽은 경우가 아니라 상식에 의한 '선한 관리(선관주의善管主義. Good Samaritan)'를 못해서 물에 떠내려 간 것 처럼, 사람이 담벼락을 허술하게 쌓았던지 보수를 안해서 무너져 참사가 일어 났다는 성서적 의미입니다.
'세상의(of the world)'란 말씀이 성서 66권 중에 33책에 기록된 바;
시편 17편:14절 'From men of the world(세상 사람들로부터)'를 (비록 한글성경에는 "이 사물의 제도의 사람들에게서 피하게 해 주십시요"라고 요상하게 번역해 놓았지만) 그들 아미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시하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이란 말씀은 '생산적인 땅(the foundation of the world)'이란 뜻도 된다는 걸 그들이 간과했다는 결론입니다.-사무엘 하 22:16, 욥기 18:18, 시편 18편 15절†
¹. 세례는 물로 몸을 씻어 정결하게 해주는 기독교 의식인 것 같습니다. 제가 세례를 세번 받았는데요, 침례교 세례가 제일 엄격한 것 같더군요.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절에 가니 "참 잘 오셨다"며 얼마 후 총무를 시키질 않나(머리에 뜸은 안 놓았지만요),
침례교회(교회 밖에 써붙이질 않아 몰랐지요)에 갔더니 김중완 목사님이 가족탕 만한 욕조에 찬물이 채워졌는데 그 목사님이 먼저 그 냉탕에 들어가신 후 저에게 들어오라시기에 들어갔더니 "세례란 먼저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예식이다"라며 저는 준비도 않했는데 갑자기 제 대구리?를 물 속에 쑤셔 박아 아차 "어? 이게 목욕탕이 아니구나. 내가 이제 죽는구나"라며 물을 먹었지요.
그 다음에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와서 동창이 자꾸 가자기에 순복음교회를 갔더니, 박순종 목사님이 저에게 세례받았냐 여쭈시기에 "예 받았지요", "어디서 받았습니까?", "오우하오주 컬럼버스 침례교회에서 받았습니다"랬더니 고개를 갸웃뚱 하시며 "이 거 어려운 것 아닙니다"라시면서 제 이마에 쪼르르 물을 부어 두번 째 세례를 받았지요.
세번째는 저희 성당학교 다니던 저희 애들이 성당을 나가기에 "아이구 이러단 안되겠다. 교회를 통일해야지"라며 성당을 나갔더니 남시몬신부님이 먼저꺼는 안됀다며 예비자 교리 6개월 후에 이마에서부터 코쪽으로 물을 쪼르르 흘려지고 영세를 받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교회상(像)은 장엄한 예배(미사) 제사의식, 세례(영세)를 포함한 전례(典禮. 성사聖事), 교리(율법), 헌금(예물)에 있지 아니하고, 이미 죽은 분을 있다고 보고 추모하고 가르침을 내 마음에 받아드리는 믿음을 소박한 화목(평화)에 살천함으로써 모든 종교의 수평성 동일한 상(象)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간결소박하게 표현한 영국 맥크리몬즈(McCrimmons,1997) 미국 가톨릭 기도서(1995), 호주 성 바오로 매일기도서(1996), 미국 기도 핸드북(1997)에 따라 로만 가톨릭 성당에서 헌금(봉헌)기도 전에 모든 교회출석자들이 함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침이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이 제사를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꺼이 받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
까닭은 기독교 역시 부탁의 기도를 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마지막 일곱번째 말씀도 "하느님 저를 부탁합니다"였기에, 기독교 신자 역시 주님이 명령하신 성찬식을 거양하기 전까지 예배(미사)를 합목적적으로 잘 보아 왔는지 나쁘게 봤는지 어여쁘게 받아주시라는 부탁과 함께 순결무구 청정(淸淨)한 주님의 살이요 피인 빵과 포도주를 교회공동체가 나누어 받는 아가페 애찬(愛餐. eulogia. 사도 2:46)의 당위성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