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잔인무도한 자를 서양사에서 폭군(echetus. Od.18,85)이라 기록하는바, 서사시 일리어드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시우스가 불량한 염소치기 멜란토우스(Melanthous)의 코, 귀, 손과 성기를 잘라 개에게 던진 적이 있섰습니다(Od.12,474).
그런데 왜 일본군인이 우리 선조 코와 귀를 짤라갔을가요?
(군사정권 국무총리格)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1차 침공(1592.4.13)하더니, 5년 후에 대정대신(무관총리)으로 승격하여 재차 군사를 정비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켜 쳐들어 오게 하며 조선(한국)을 '보복한 증거(Proof of Duty Done)'를 가져오라는 엄명을 하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를 잘라가기로 했는데 역사에 없는 잔인함이라 코무덤을 귀무덤이라 한 겁니다.
그리고 들고갈 수 있는 건 다 약탈해가고, 들고 갈 수 없는 것은 불지르고, 얄밉게 잘 만들었는데 가지고 갈 수 없는 석굴암의 부처님 이마에 붙은 보석(금강주옥장;율장소품 5:21)은 300년 후에 뽑아갔고요, 죽은 병사, 민간인 남녀는 코, 귀 베어가고, 걸어갈 수 있는 장정은 코를 베지 않고 포로로 잡아가고, 반반한 여인은 데리고 가 첩으로 삼았지요.
물론 가져다 바쳐 결재받아 나누어 가져야 되는데 그 도요토미가 급살병으로 불귀객이 됬기에 7호대장군이 일단 수거하여 점검하고 재분배해준 거겠지요.
말은 중국을 처들어가게 길 빌려달라(정명가도)요, 통상국부론을 대마도 출신 고니시 유끼나가(소서행장)가 주청했지만, 야들이 침략이지 물물교환하러 온게 아니고요. 이 걸 두고 그들의 '비열한 플레이(cheap shot)'라 하지요.
그러니까 지난 2천년간 약탈해간 것이 일본의 유동자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리고 위에 말씀올린 5,444개의 귀를 짤라간 그 '와도직무(1537~1619)'가 조선을 병탐한 후 곧바로 우리나라 사람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갈아치우는 1. 창씨[개명]건의서와 2. 징세계획서를 대정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제출합니다.
물론 이 때는 도요토미가 죽는 바람에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이로부터 300년 후에 조선총독부에서 위에 말씀 올린 식민정책 1, 2 를 실행합니다.
더더구나 일본녀석들은 비굴, 비겁, 치사하여 정면 승부를 걸자고 제의해도 말을 들어먹질 안합니다. 그러다 붙어 '고상[항복]'할까봐.
그 영토확장을 주장하며 쳐들어 온 7호대장군 가또 기요마사(가등청정)에게 우리나라 기마대장 한국함이 1:1로 붙어 승부를 나누자니까, 거절하고 밤을 새워 인해전술로 산등성이로부터 포위해와 물속으로 밀린 한국함대장을 창으로 찔러 죽입니다.
그가 죽은 곳 혜종창은 함경도의 쌀창고. 그는 종성, 은성, 부령, 경흥에 이어 설치한 서반직소 유원위 직책 대장으로 말타고 달리면서 활을 잘 쏘는 수비대장. 졸저 멸절의 문명 p.91
함 봐요! 진주만 포격때에도 한 쪽에선 미국과 평화회담하면서, 해군이 휴가나간 일요일을 택해 카미가제(kamikaze)특공대로 태평양함대를 침몰시켰잖아요.
아시다시피 그 '신의 바람(신풍神風)'에 제일 먼저 실패한 경우가 흉노족이고, 다음이 몽고 쿠빌라이칸이고, 일본 자체도 이 태풍에 매년 고생을 하지요. 쓰나미와 폭풍은 일본의 천적입니다.
그래서 툭 하면 해적으로 휩쓸고 다니는 갸들의 역사적 과오를 알고 나서 우리가 그걸 용서하지 않는 한 고양이같은 그들에게 반드시 또 당한다는 겁니다.
일본 사무라이는 지면 죽는단 정신.
이 승전병법 원칙을 유럽전쟁사에서는 '정의가 어느 편에 있든 약한 쪽이 지게 마련'인 파비안 원칙(Principle of Fabius:B.C.317)이라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