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태종 3년(1403) 8월 19일에 명나라 사신 마린(馬麟)이 우리나라 기생의 수청을 요구하자 해달라는대로 그렇게 붙여줬다.
그리고 소, 말, 여인이 중국 명나라로 공출될 때(태종 8년. 1408):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絹) 딸. 중풍맞은 것 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해 애비가 개령으로 귀양가고 이조참의 김천석(金天錫) 딸. 중풍걸린 것 같이 시도때도없이 머리 흔들어싸 애비가 정직당하고 전 군자감(軍資監) 이운로(李云老) 딸은 다리가 병든듯 절뚝거리자 애비가 음죽으로 귀양가다.
까닭은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의 말이 '처녀간택에 빠진 자가 많다'며 난리법석, 크게 화냈기 때문임.
그리하여 황엄이 직접 경복궁에서 처녀를 면접했다. 순찰사들이 8월에 뽑아온 580명 중에서 11월 12일에 다음 5명의 처녀를 뽑음
공조전서 권집중(權執中) 딸 소옥(18) 안녕부 좌사윤 임첨년(任添年) 딸 17세 공안부 판관 이문명(李文命) 딸 17세 중군 부사정 최득비(崔得菲) 딸 16세 충좌 시위사 중령 여귀진(呂貴眞) 딸 진향(16)
그리고 종부부령 황하산 딸 채주를 점찍어 두고, 권문의(호패법 발안자) 딸이 아프다며 심사날에 불참하자 투옥시키다.
해가 바꿔, 다음 해인 태종 9년(1409) 5월 3일에 명나라 사신이 공표하기를 "작년에 데리고 간 여자들과 재미를 못봤다.
하면, 처녀가 살찐 것은 살찐 것이고, 바싹 마른 건 마른 것이고, 여인이 키가 작은 건 키가 작은 것이고 그 쓰임새에 따라 비(妃), 미인(美人), 소용(昭容) 등 관명(官名)을 줄테니깐드루 왕이 뽑아둔 애가 있거들랑 한 두명 데리고 와보슈." ㅋ 사실이여~~, 이조실록!
태종 17년 5월 9일. 처녀 황(黃)씨, 한영정의 딸 한(韓)씨가 끌려가 명나라에서 상등(上等)의 벼슬을 받다.
세종 6년 10월 17일 한영정의 딸이 명나라 태종이 죽자 이 대행황제(大行黃帝:붕어한 임금) 무덤 속에 순장(殉葬)됨. 이 때에 궁녀 30명이 순장되었음.
세종 9년 5월 1일 경복궁 담 밖에서 "딸아 울지마라"면서 엄마 울음소리가 컸다고 기록된다.
세종 9년 5월 1일에 한영정의 막내딸이 또 끌려갔다. 이 애가 끌려가기 전에 몸져 눕자 오라버니 한확(韓確)이 약을 달여주자 물리치며 "오라버니는 누이 팔아 부귀가 극진한데, ..", 혼수감으로 마련한 침구를 찢고 재물을 친척에게 나누어주고 결국 중국으로 끌려가 제 4대 선제(宣帝)의 후궁으로 책봉됨.
세종 11년, 명나라 성조주체(聖祖朱체) 때에 여귀진 딸 진향이 중국 궁녀 중의 하나가 동성애를 요구할 때에 거절하자 반감을 품고 모함하여 이로 인해 여씨, 궁녀, 환관 2800명이 떼죽음을 당한다(동성애사건).
이에 세종대왕이 중국에 건의하여 여인공출습관을 폐지시킴.
세종 16년(1434)에 중국사신이 들어와 여인과 동침하기를 원하자 그 청을 들어준다. 명나라 영종(英宗) 즉위(1435).
금나라 정묘호란(1627)으로 형제의 맹서, 청나라 병자호란(1636) 후 형제의 맹약을 맺어 인조 15년(1637) 11월 18일. 청나라 군인들을 위하여 고을마다 기생을 준비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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