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은 있음이 있음으로써 확인되는 바, 석가여래 공사상, 성경의 하나님 경외사상, 노자 도덕경 11장 수레바퀴 비유(삼십폭공일각),...이 모두 존재론적이라 여기지요.
그 까닭은,...우리 가급적 쉬운 말로 나눕시다.히히
예를 들어 하늘이 텅 비었다, 허공이라 함은 수풀, 산, 빌딩으로 채워진 땅의 경치를 봄으로써 대조가 되는 것이요,
비워진 것, 그 하늘은 비워진 테두리에 물체가 있음으로써 비어짐을 알 수 있는 바,
물질의 본질이 '비워진 것, 즉 오직 공(空)'이란다면, 이 것은 광활한 풀밭 속에 쳐진 내 집 울타리를 염두에 두지 않듯이, 또는 마치 빈칸(공백)이 빈칸(공백)이 되겠끔한 있음을 무시하듯, 또는 검투사가 상대편의 헛점만 보았지 수비자의 손에 쥐어진 '빛나는 방패(빈칸.斌干)'격인 그 구조물을 제외시키는 격입니다.
즉, 음양으로 보아도 있음(양)과 없음(음) 중에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겁니다.ㅎㅎ
노자의 표현을 빌려 재차 확인해 봅시다요.
마차에 바퀴를 달기 위해 마차 밑에 고리로 굴대[바퀴축]를 가로로 매달아 덜렁거리지 않게 고정시켜 바퀴만 앞 뒤로 구를 수 있게 만듭니다. 그래야 차축은 그 자리에서 돌거나 고정되어 있고, 바퀴만 돌게 되겠지요.
자 이제, 마차 바퀴 설흔개의 막대로, 자전거 바퀴살처럼, 더 작은 바퀴에 이어져 있는데 이 작은 바퀴 가운데 구멍에 축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작은 바퀴에 뚫린 '빈 구멍(공)'에 눈에 보이는 차축(있는 실체)을 손으로 들어 끼워 맞춘다는 것은 없음은 있음을 위해, 있음은 없음을 위해 유용하다는 것처럼, 공사상의 없다는 개념은 '있음이 있음으로서 의미'가 있고, '보이지 않는 물체는 보이는 것이 있음으로서 알 수 있음'으로써,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없음의 가장자리에는 반드시 보이는 물체가 존재한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공사상, 기독교 하나님 경외사상, 노자의 허공존중사상 모두가 존재론적이란 의미겠지요.
이 말씀은 '비워진 없는 것' 경계선에는 반드시 채워지겠끔 자리잡아준 울타리 골격(骨格)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있음'에 대한 반대는 '없음'인데, '없음도 아니라'는 보충법으로써 인식되는 반야심경이요,...변증법적인 정ㆍ반ㆍ합이 아닌 보충법으로서 '있음'이라는 테제를 보충하는 안티테데의 대조법이라 합니다만,... 고쳐 말하면 '없다'는 '공'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공사상은 존재론적이란 의미입니다.
즉, '빈 것'이 '없음도 아니라'는 말은 '있음'을 인정하는 연결고리로써 반야심경을 확대해석한 금강경의 골자라고 여겨집니다.
자 그러면 유마경 제 7 관인물품(觀人物品)을 그 '공즉시색'의 반야심경을 설법한 관세음보살 공사상에 대조해 봅니다.
관세음보살의 '없음'은 '정말로 없음이 아니라'는 설법에 정면 도전한 유마보살은 물질의 본질은 없음인 바, '없음은 진짜로 없음'이니, '사람은 물 위에 비친 달과 같다'고 설법합니다.
물론 모든 형상이 허망하기에, 피와 살과 몸둥이 또한 물거품과 그림자로 돌아가지만, 있섰다는 건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물이란 존재는 산소 1개ㆍ수소 2개로 물분자를 이루는데 물 한 방울 속에 무수한 물분자가 들어있음과 동시에 그 물분자 사이에는 찬 진공[없음]입니다. 봉선화 꽃물은 그 진공에 분홍색으로 채워진 것이지요.
즉, 진공이 없으면 물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겠서요?
최상의 슬기가 아니면 환히 깨닫는 마음도 없으리라는 유마경과 soand so님이 퍼온 물질의 '본질'이란 글 내용에서는 진공만 강조했지, 물분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알지요.
석가 10大 제자들이 벌벌 떤 유마거사.
석가가 유마보살이라며 "내가 큰 바다 속을 알지언정 보살의 마음을 알 수 없다"라셨지요.
이 분이 거짓으로 아프다고 소문을 내어 석가의 제자가 문병오기를 유인하지요.
석가가 명령하여 억지로 찾아간 지혜 제 1이요 수제자인 사리불(사리푸타, 문수사리보살)에게 유마보살이 내린 설법이 유마경(비마라힐경;유마힐소설경) 제 5 제법언품(諸法言品).
얼마나 어려운지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하기를 삼국지 손권에게 발탁되어 태자의 스승이 된 지겸(支謙)이 33년간 소비했고(건흥 2년, AD253 번역완료), 후진(後秦) 때 구마라집(AD 406)이 다시 번역했다니, 저로서야 난독이요 수박겉 핥기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지 않는 점이 있는데요, 비록 최상의 슬기가 아니면 환히 깨닫는지 못한다는 유마경의 내용이지만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기에,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인과율을 인정하신 석가님 설법과 전혀 다름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 말씀은 유마보살의 본질론이야말로 '우리가 보는 물건들은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이고, 냄새, 맛, 접촉, 생각, 의식까지도 다 한가지로 텅텅 비어 있음을 본질로 하여 이 빈 본질을 보지 않고는 보는 것마다 피조물이니, 어디서 창조주 하나님을 보았다고 망령된 말을 조심없이 하느냐"라는, 물질의 '본질은 빈 것'이라는 soand so님이 퍼온 어느 유마라는 이름의 글 '하나님이 없다'는 가정과 일치합니다.
제 말씀의 요지는 물질의 진수(眞髓)는 '빈 헛것'이라는 유마보살이, 설법하기는 이와 정반대로 소승불교로 너희들만 부처가 되려 말고, 사대부중, 모든 사람을 교화하여 모두가 부처되도록 해야한다'는 대승불교 쪽을 석가에게 권유했다는 점인데요, 그러나 사실은 '있음'을 인정한 석가여래야말로 그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선열반의 도(道)를 설법하시는 '큰 배(대승大乘. Great Vehicle)' 불교를 하고 계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