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기 도선대사가 보아 온 서울 풍수. 용봉의 삼각산 줄기! 이 도선대사가 쇄왕론에서, 특히 인왕산을 도참비보설에서 광화문 자리에 지형적 미를 살려 놓아야 한다고.
고려 숙종 4년(1099)에 왕이 친히 삼각산에 행행하여 도지(도읍지) 입지조건을 관망했고,
무학대사가 이성계와 같이 재확인하여 도읍지로 정한 서울.
살꽂이 다리(한양공대 남측 청계천 수중교 돌다리)에서 '왕십리'하여 경복궁 태방. 경복궁 터가 젊은이 잠지.
서쪽을 중심으로 45도 각거리를 그림자지게 하는 인왕산이 북악산에 너무 가깝다.
숭례에서 청파로 가는 물골을 파야겠네.
만약 않 하면 당파로 피를 많이 흘린다라고.
그리하여 태조 3년에 갑제 경복궁이 난리와 불에 힘이 약하다고 노음 구기 간방을 등지고 13정 고승 곤방을 향한 좌향으로.
범철관의 24방위의 15번째 오행유속 목양궁전을 축조했지만 목구멍에 가시 걸린 것처럼 찜찜하여 성종 때 와룡동 수강궁 자리에 창경궁을, 원서동에 돈화문 창덕궁을 짓고, 역대의 왕들이 이 궁에서 정사를 돌보기 위해 상주한다.
자리 탓인지 인걸이 모이지 않는 덕이 없는 왕정인지, 방원 태종이 정종을 몰아내고 태종으로 즉위-정란으로 왕위를 찬탈, 이 태조 함흥차사에 이어
수양대군 세조 때부터 사륙신을 도륙하기 위해 불로 지지기 시작, 사색, 8색 당파에 찌들대로 찌든 위에 숙종 원년(1675)에 허적의 유악사건. 송상민의 석곡봉사, 김육의 기묘록, ..
경종 신축화란, 을해옥소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영조 때의 김재로 천의소감.
그 까마귀의 암수가 비슷하여 분간하기 어렵듯 우리나라 사색, 8색당파 여당과 야당이 상대 편의 폐스러움을 다투어 말하지만 옳지 않다고 말할 당이 구별이 않되네.-시경:수지오지좌웅, 설폐구폐, 수왈불가
주판 튕기기에 바쁜 관념형태의 모략중상.
왕후장상의 사회적 의식은 역사적인 사회적 경제에 입각하여 서민의 소득에 의해 제약받는다며 가렴주구가 여전히 부족하여 경쟁자를 쫓아 내고 대신 훑으려고 경영학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며 지키니라고 칼부림 낸다.
임금이나 대통령은, 하다 못해, 영조(대왕이라고? ㅊ)는 왕사, 후비, 부인, 왕세자가 모살된다 하드라도 사직의 안녕으로 당신만 빼내어 준다면, 흥정하는 아쾌에게 '참소자가 짐을 폐위만 시키지 아니 하면 누구든지 출척해도 좋다'고 윤허했다.-'후한서:봉준홍서, 위교모주'를 닮았군! ㅊㅊ
그 수양대군 때부터 한 두 번 피 흘린 궁전이 아님.
남은 건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집옥재에 써 붙인 춘첩자마저 명종 8년(1553)불타 이듬 해에 개수하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에 불타 고종 4년(1867)에 흥선대원군이 재건. 졸저 28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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